카테고리: z 05-09년 / 이 사람

느림보 형님 & 곰탱이 형님

느림보 형님 (네이버 아이디)

곰탱이 형님 (네이버 아이디)

처음 산에 갔을때 두려워 하고 거의 전무(全無)한 나를 가르쳐주고 지켜주신 싸부 형님들. 느림보 형은 참 세심하고 잘 챙겨주는 스타일 이라면, 곰탱이 형님은 묵묵하게 뒤를 맡아 지켜주시는 스타일.

설악산 종주때 체력저하로 쇼크가 올때도, 태백산 산행때 그 눈밭에서 잘때도. 본인도 피곤한데 하나하나 나를 비롯한 산행동지들 하나하나 챙겨주고 배려해주시는 모습을 보고, 세상 나름대로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나를 많이 반성하게도 해주셨다.

받은만큼 잘해드리고 싶기도 하지만, 산이랑 같은 맘을 가지신 분들이라 언제나 배풀기만 하셔서, 언제나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싸부들 건강하시고 제발 담배좀 줄이세유. 평생 같이 산 타고 다닙시다. 싸부님들.

미네르바 무죄기념 – 위키백과에 있는 이명박 프로필 공개

이명박 (李明博, 1941년 12월 19일 – )은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기업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특별시 시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8월 20일 전당대회에서 경선 결과가 발표됨으로써, 한나라당200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확정되었다.[1]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이며, 신자유주의와 경제성장을 중시한다.

목차

[편집] 생애

[편집] 어린 시절

일본 오사카 시 히라노 구(平野區) 에서 4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고, 동지상고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중 기관지확장증으로 군대를 면제받았다.

[편집] 현대건설 시절

1965년 현대건설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12년만인 1977년에 사장 자리에 올랐다. 현대건설을 대기업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도 있고, 내실을 다지지 못해 현대건설의 법정관리를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한겨레21지는 2007년 7월 26일 제670호에서 이명박 후보의 현대건설 시절을 조사하여 비판하였다.[2]

[편집] 정계 입문

14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재산공개 직전에 아파트를 다른 사람 명의로 소유권 이전을 하는 등 불성실하게 재산공개를 하여 비난을 받았다. 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하여 이종찬, 노무현에게 승리함으로써 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비용을 속였다는 것이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의 폭로로 인해 밝혀지고, 뒤이어 김유찬해외로 도피시킨 사실까지 밝혀졌고 이후 유죄선고를 받았다. 이명박 후보는 당시 의원직을 상실하기 직전에 사퇴하였다.

[편집]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을 복원하여 많은 인기를 끌었다.
지만 본인의 시장 재임시절 공사를 완공하기 위하여 복원을 지나치게 서둘렀으며, 복원과정에서 발견된 문화재들의 처리문제와,
자연상태로의 청계천 복원이 아닌, 상수도물을 사용하여야 하는 청계인공천으로의 공사등, 환경과 문화적인 고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청계천의 개발로 인해 청계천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을 떠나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청계천 사업 과정에서 양윤재 서울시 행정부시장이 재개발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서울시의 버스 체계를 개편하였다. 버스의 번호와 색은 좀 더 체계적으로 바뀌었고, 환승 횟수와 상관없이 거리에 따라 요금이 매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개편으로 인해
버스회사들의 적자를 메우는데 수천억에 이르는 서울시의 예산이 쓰이게 되었으며, 요금도 오르게 되었다. 새로운 교통카드 시스템이
이명박 후보의 서울시장 취임 2주년에 맞추어 급하게 도입되느라 많은 오류와 혼란을 빚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교통카드 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사업자를 사전 내정했다는 의혹이 있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치적을 늘리기 위해 국제금융센터 건립을 지나치게 서둘러 금융 그룹 AIG에게 지나친 특혜를 주었으며 그로인해 AIG가 1조원 가량의 차익을 남기게 해주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3]

재직 당시 5조원이던 서울시의 부채를 2조원으로 줄였다고 했으나, 그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한나라당 경선 도중에 박근혜 후보 캠프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4]

[편집]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후보와 경선을 치루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2위 박근혜 후보를 2452표차로 누르고 선출 되었다.

[편집] 비판

[편집] 4강 외교 추진 및 불발

2007년 10월 중에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순방하고 지도자들을 만날 것이라고 발표하였지만, 모두 거의 무산되었다.[5]

이명박은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과의 면담이 성사되었다며 면담 일정을 공개하였으나, 미국 백악곽은 이를 공식 부인하였다. 공식적인 외교 채널을 거치지 않고 추진했다는 비판이 있었으며, 사대주의 외교에 대한 논란도 대한민국 정가 및 언론계에 있었다. 한편, 오마이뉴스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전 장관과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6]

[편집] 황제 테니스 사건

서울시장 재직 당시, 시 산하 체육기관 등의 후원으로 황금시간대에 테니스장을 독점하면서 공짜로 “접대 테니스”를 즐겼다는 의혹을 받았고,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문제가 불거지자 뒤늦게 사용료 600만원을 지불하였다.

자세한 것은 이명박 공짜 테니스 의혹 사건을 참조

[편집] 위장 전입 의혹

경선 기간 도중, 이 전 시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위장 전입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69년 이후 모두 24차례의 주소 이전 중에 1977년의 중구 남산동 이전, 1979년의 중구 필동 이전, 1981년의 중구 예장동 이전, 1984년의 서대문구 연희동 이전은 세 딸(리라초등학교)과 막내 아들(경기초등학교)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주소지 이전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부인 김윤옥씨가 이 전 시장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집으로 주소지를 옮긴 이유는 아들의 중학교 입학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시장은 2007년 6월 16일
“알아봤더니 30년전 아이들초등학교 들어갈 때 그렇게 된 것 같다. 어떻든 저의 책임이니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사과했으며, 부동산 투기 위혹은 모두 부정했다.[7] 한편, 한나라당이 지금까지 고위공직자 후보 검증과정에서 위장 전입을 강하게 비판해왔고, 그 때문에 낙마한 사례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8]

이명박이 소속된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집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국무총리 추천에 있어 국무총리 후보자(장상 등)의 위장 전입 문제의 도덕성 문제를 집중 공격하여 노무현 정권의 총리 지명을 여러번 무산시킨 전력이 있다.

[편집] 뉴타운 의혹

[편집] BBK (옵셔널 벤처스) 주가 조작 연루 의혹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1996년 국회의원 당선 후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 중 국회위원직을 사퇴한 후 미국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이때 지인이었던 에리카 김(미국 한인 여성 변호사)의 남동생 김경준과 함께 2000년 한국에서 사이버 금융
사업을 시작하였으나, 동 회사의 펀드 운용 위조 보고서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조사가 시작된 후 동업 관계는 청산되었다. 사업 종료
시점에서 이명박 후보의 동업자인 김경준이 옵셔널벤처스라는 회사를 창설한 후 주가 조작을 통해 380억의 회사 자금을 횡령한 후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김경준은 이 회사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이명박이라고 주장하나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이를 부인했다.

현재 미국에서 재판중인 김경준의 대한민국 송환을 희망한다고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2007년 10월 11일 영남일보와 문화방송 100분 토론에서 주장하였으나 바로 전날 이명박 후보의 미국내 소송 대리인은 송환 연기신청을 한 것으로 밝혀져서 대통령 후보의 거짓말 여부에 대한 파문이 일었으며 한편 이명박 후보측의 김경준 한국 송환 연기 신청은 미국 법정에서 기각되었던 바 있다.

10월 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은 재차 김경준의 한국내 처벌을 선거 운동 과정에서 주장하였으나, 그 전날인
10월 19일 이명박 후보는 미국내 소송 대리인을 통해 재차 김경준 한국 송환 연기 신청을 미국 법원에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가 연루된 형사 사건의 재판이 미국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최초이다.

[편집] 경부 운하 공약

경제성, 식수 오염, 공사 비용, 공사 기간등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9] 한편, 이명박 후보는 경부 운하 공약을 공개 토론을 통해 검증하자고 했었으나, 2007대선시민연대가 공개토론을 제안하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거부 의사를 밝혀 문제가 되고 있다.[10]

[편집] 선거법 위반과 범인도피

1996년 4·11 총선 당시 ‘대한민국 정치1번지’ 서울 종로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다. 14대 국회에 여당의
비례대표 의원으로 들어온 그는 이로써 ‘CEO출신 정치신인’이라는 딱지를 떼게 됐다. 그러나 그해 5월11일 각 후보들의
선거비용 액수가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야 4당 후보중 신고 재산액(2억6000만원)이
가장 적었고 최하위 득표를 기록한 김을동 자민련 후보가 4명중 가장 많은 선거비용(9255만원)을 신고했기 때문이다. 2위는
노무현 민주당 후보(7271만원)였고, 이명박 신한국당 후보(7149만원)와 이종찬 국민회의 후보(6819만원)가 각각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이명박은 262억원 가량의 재산을 가진 재력가였고, 그가 후보 중 가장 공세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했다는 평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가 3∼4위 후보보다 적은 비용을 신고하자 뒷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특히 노무현 후보는 이명박의 신고액에
대해 “한 마디로 코미디”라며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총선 당시 이명박의 선거기획을 담당했던 김유찬이 넉 달 후인 9월10일 국민회의
당사에서 “이명박이 총선 당시 전화홍보 및 각종 행사비용 등으로 6억8000만원을 썼고, 이중 3800만원 가량의 영수증을
가지고 있다”고 폭로한 것이다. 검찰수사 결과, 당시 국회의원 6급 비서관이었던 김유찬은 이명박이 국회의원 재선에 성공하자 5급
비서관으로 승진시켜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에게 이명박의 선거법 위반 사실을 제보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명박은 사건 초기부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고려대 후배로서 이명박의 ‘자문역’을 자임했던 홍준표 의원도 “후보 또는 회계책임자 등이 금품전달을 지시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당선무효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종로구의 법정선거비용이 9500만원이었기 때문에 김유찬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잃을 게 분명했다. 한편으로, 공소시효 만료일(96년 10월10일)만 넘기면 이명박이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96년 10월 9일 이명박은 형법상 범인도피 및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97년 9월11일 1심에서 법정선거비용 초과지출 및 범인은닉 혐의에 대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유죄선고로 인해
국회의원 자격을 잃기 직전인, 이듬해 2월 21일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명박은 98년 4월28일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400만원, 김유찬의 해외도피 혐의로 벌금 300만원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명박은 “서울고법의 항소심 선고는 법적 판결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판결로 도저히 승복할 수 없다”며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포기했다. [11]

[편집] 공인으로써의 품격에 대한 비판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방문중 유영봉안소안에서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사진에 포착되어 구설수에 올랐다. [12]

서울시장 재직 시절 월드컵 한국 대표팀 히딩크 감독과의 공식 행사에 외국 축구팀 유니폼을 착용하고 슬리퍼를 신은 아들을 입장시켜 기념 사진 촬영을 하여 시장으로써의 공사분별에 대한 지적을 받았다. 이명박 후보는 일정이 끝난 후에 촬영한 것이라고 해명했으나, 사실이 아니었으며, 기념 촬영으로 인해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시간이 취소되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명박 후보가 소유한 양재동 건물에 유흥업소가 입주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13]

2007년 9월 선거운동중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 “안창호씨”를 존경한다고 표현하였다.

[편집] 부적절한 발언에 대한 비판

연이은 말실수로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비판과 철학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4]

아이가 불구일 경우에 낙태를 허용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는 발언이 문제가 되어 사과하였다.[15]

경선 승리 후 주요 일간지 편집국장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이야기하다가 “얼굴이 예쁜 여자는 이미 많은 남자들이… 그러나 얼굴이 덜 예쁜 여자들은 서비스도 좋고…”라고 이야기했다고 알려졌다.[16] 이 발언은 오마이뉴스한겨레를 제외한 다른 언론들이 거의 다루지 않았으며, 이러한 침묵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17]
이 발언이 알려져 여러 여성 단체들과 정치인들이 이명박 후보를 비판하였다. 한편, 이명박 후보측은 이 발언이 전후 맥락 없이
왜곡보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명박 후보는 답변서를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취지였고 특정 직종을
암시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18] 그러나, 최초로 발언이 보도됐을 때 발언 자리에 함께 있던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이 그런 발언이 있었음을 사실상 시인했고, 이명박 후보의 측근들은 ‘선배의 얘기를 한 것’이라고 변명했으며, 박형준 한나라당 대변인은 성매매가 아니라 발마사지였다고 해명하는 등 엇갈린 해명으로 문제가 되었다.[19]

한나라당 경선과정에서 정우택 충북지사와 주고받은 농담이 문제가 되었다. 정우택 지사가 이명박 후보에게 “예전 관찰사였다면 관기라도 하나 넣어드렸을 텐데”라고 말하자 이명박 후보가 “어제 온 게 정 지사가 보낸 거 아니었냐?”라고 대답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문제가 되었다.

국회가 합의한 ‘행정중심 복합도시’안을 “군대라도 동원해 막고 싶다”고 발언하여 문제가 되었다.[20]

[편집] 건강보험료 의혹

이명박 후보는 수백억의 자산을 가지고 있지만, 2000년에서 2002년 동안 월 1만5000∼2만3000원의 국민건강보험료만 냈다는 것이 알려져 건강보험료 납부를 회피하기 위해 편법으로 직장의료보험에 가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1]
한편, 국민연금의 경우에는 소득을 345만원 이상(최고등급)으로 신고하였지만 의료보험의 경우는 200만원 가량 적은 100만원
대로 소득을 신고하여 소득을 속였다는 의혹과, 11개월간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았다는 의혹도 함께 제기되었다.

[편집] 프로필

청계천 복원 사업 공사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명박(가운데).

[편집] 일반

  • 생년월일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

[편집] 학력

  • 1960년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 1965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교 객원연구원
  • 2004년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 2005년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편집] 경력

  • 1965년 현대건설 공채 입사
  • 1977년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 1988년 현대건설 회장
  • 1977년~1992년 현대건설, 인천제철 등 현대계열사 10개사 사장 및 회장
  • 1992년~1998년 제14, 15대 국회의원
  • 1992년~現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클린턴 전 대통령 주지사 시절 위촉)
  • 1999년~2002년 아·태 환경 NGO 한국본부 총재
  • 2000년~現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 2002년~2006년 제32대 서울특별시장(민선 3기)
  • 2006년~現 (사)매헌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 2007년 8월 20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

[편집] 저서

  • 1995년 신화는 없다
  • 2002년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 2005년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 2007년 온몸으로 부딪쳐라, 어머니,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편집] 상훈

  •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 1985년 금탑산업훈장
  • 1998년 대한민국 50년을 만든 50대 인물(조선일보)
  • 1999년 20세기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국경제인연합회, 매일경제)
  • 2005년 2005 세계의 인물 대상(영국 파이낸설 타임즈 그룹 fDi 매거진)

[편집] 가족 관계

한나라당 국회의원 이상득은 이명박의 친형이다.

[편집] 주석

  1. 한나라당 대선후보 이명박 확정, 《연합뉴스》, 2007년 8월 20일.
  2. 믿습니까, 이명박의 ‘유능한 CEO’ 신화, 《한겨레21》, 2007년 7월 26일
  3. 국제금융센터, AIG는 계약때부터 매각 계획, 《KBS》, 2007년 8월 21일.
  4. 박근혜 캠프 “이명박, 서울시 부채 5조 더 늘려”,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13일.
  5. 이명박 ‘4강 외교’ 무산되나?, 《프레시안》, 2007년 9월 26일.
  6. “이명박, 작년에는 럼스펠드 면담 부탁했다”, 《오마이뉴스》, 2007년 10월 4일.
  7. 李 “위장전입 자녀교육 때문..국민께 죄송”, 《연합뉴스》, 2007년 6월 16일.
  8. 역대 낙마 사례, 《세계일보》, 2007년 6월 18일.
  9. 경부운하를 둘러싼 이명박의 7 대 거짓말, 심상정, 《오마이뉴스》, 2007년 5월 29일
  10. “이명박, 경부운하 검증 제안에 ‘문자’ 답변”, 《프레시안》, 2007년 9월 13일
  11. 끝까지 ‘범인도피’ 부인한 이명박 – 96년 선거법 위반 사건의 진실은?, 《오마이뉴스》, 2007년 2월 16일.
  12. 이명박 서울시장 5·18묘지서 부적절한 파안대소, <<한겨레>>, 2005년 4월 24일.
  13. 박용현, 대선후보와 ‘섹시클럽’: 품격의 검증, 《한겨레》, 2007년 7월 17일.
  14. 이명박 후보의 한 달 – ② 끊이지 않았던 말실수 논란, 《내일신문》, 2007년 9월 20일.
  15. 이명박 “낙태 반대하지만 불구로 태어날 경우엔…”, 《한국일보》, 2007년 5월 16일.
  16. 이명박 후보, 편집국장들에게 부적절 비유 – 얼굴 ‘예쁜 여자’보다 ‘미운 여자’ 골라라?, 《오마이뉴스》, 2007년 9월 12일.
  17. 고태진 칼럼, 이명박 발언 들은 편집국장들, 왜 침묵하나, 《오마이뉴스》, 2007년 9월 13일.
  18. 이명박, ‘마사지걸’ 파문에 “골고루 기회주자는 취지”, 《프레시안》, 2007년 9월 18일.
  19. ‘이명박 마사지걸’ 해명 “농담→발마사지→기회균등 강조”, 《한겨레》, 2007년 9월 18일.
  20. 이명박 “군대 동원해…” 김현미 “쿠데타 수제자…”, 《한겨레》, 2005년 2월 25일.
  21. 수백억 자산, 건강보험료는 월 2만원대, 《오마이뉴스》, 2007년 7월 20일.

미네르바 무죄 기념. 사기꾼 프로필 공개. 잡아 넣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4년을 어떻게 버티냐고. 아놔.

김수환 추기경 하늘로 돌아가시다

교회는 자기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고 세상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 있다

– 김수환 추기경

종교를 떠나 이념을 떠나…정말 정말 아름다운 분이 돌아가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수원시립교향악단 | Make Me A Channel Of Your Peac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생일축하…


경모는 나보다 몇살 어린 사업가. 젊은 나이에 이뤄낸것이 많은 재력가 이기도. 고맙게도 그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서 새벽까지 그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의사에 은행 지점장까지… 참 제대로 살아온 녀석 경모. 게다가 여자친구가 탈렌트 셨구나. 초대해줘서 고마왔다. 다음 바베큐 파티때는 뭐라도 들고가야 할텐데. 미안해서 이거참.

최진실씨 명복을 빌며..또 그다음은 누구일까.


나 또한 십년이 지났어도 말로 인해 얻은 상처는 마치 어제 처럼 선명하고 고통스럽다. 하물며 공인이었던 그녀는 더더욱 그랬겠지. 사랑하는 두 아이를 남겨두고 죽음을 선택해야 했을정도로…

직접 겪어보지 않은 상대방을 ~ 하다고 단정짓는것 만큼 위험한게 있을까.
생각해보면 나 또한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리고 더 신중하고 깊이 생각하며 사람과의 관계를 가져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진실씨. 명복을 빕니다.

사족) 가수 나훈아씨의 사례에서도 이미 보았듯이, 연예계의 ~터라식의 풍문이 돌면, 그걸 바로잡아야 하는게 바로 연예계기자가 아닌가 싶다. 단지 무슨 먹을거리면 생겼다 싶으면 마치 승냥이떼들 처럼 또 다른 루머를 만들어내고 또 퍼트리는, 이니셜로 먹고 사는 일부 연예기자들…

이런 일부 종자들 때문에 연예기자가 쓰레기. 연예인들 피빨아먹고 사는 모기취급 받는거겠지. 물론 자정이 불가능한 수준이니 제2. 제3의 최진실이 또 나오지 말란법 없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다음은 또 누구일까.

[인터뷰] <영화는 영화다> 봉 감독, 배우 고창석


<영화는 영화다>의 한 장면. 안경 너머로 슬며시 바라보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 김기덕 필름

 

<친절한 금자씨>에서 총을 만들어준 소영의 남편, <바르게 살자>의 우
반장에서, <영화는 영화다>의 맛깔스런 봉 감독으로 변신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배우 고창석(39)을 만나러 가는
길이 긴장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난 24일 오후, 압구정에 있는 카페 ‘조제’에 들어서면서 창문 너머로 보이는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첫눈에 친근해 보이는 이 사람. 거기에 그는 나와 같은 부산 출신인데다, 내 모교인 부산 대연초등학교에 잠시
다니기도 했단다.

 

사실 <영화는 영화다>를 본 관객 대부분이 봉 감독으로 열연한 고창석씨의 그 능글맞은 연기를 기억하며 미소를 띠곤 한다. 봉 감독이 유달리 큰 웃음을 주는 데는 자못 심각한 이 영화의 구조도 한 몫 한다.

 

영화 속 유명 영화배우인 ‘수타(강지환)’는 실제 삶과 영화 속 모습을 혼동하며 살아가고,
상대 배우를 ‘진짜’로 때려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도 다반사다. 결국 그와 함께 연기하겠다는 배우는 없어지고 진짜 깡패이면서도
영화배우를 꿈꾸는 ‘강패(소지섭)’를 만나 영화를 찍게 된다. 단, 연기가 아닌 진짜로 싸운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하지만 진짜로 싸운다고 해도 영화는 현실이 될 수 없고, 현실도 영화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다>는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심장 박동수가 최고조로 올랐을 때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해소시키는 건, 조금은 촐싹대는 봉 감독이다.

 

“하버드 갈 순 없는 나, 연기를 업으로 삼아야지”

 

일본만화 <슬램덩크>의 ‘호호’ 안 감독의 연상시키는 푸짐한 몸매에 턱밑에는 수염이
거뭇거뭇하고, 눈치까지 없는 봉 감독은 폼나는 두 주연배우 사이에서 시종일관 웃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진짜 제대로 된 영화를
찍고 싶은 열망만은 누구보다도 진지하다.

 

투박한 나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마주하니 문득 ‘푸근한 겉모습 안에는 어떤 불꽃이 타고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에 대해 궁금해졌다.

 




모자도, 옷도, 안경도 영화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좋았다.
ⓒ 이유하

– 오랫동안 극단 생활을 했다고 들었다. 20여년 동안 연기한 셈인데, 처음부터 연기에 뜻이 있었던 건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이런 쪽으로 전혀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대학교 땐, 일본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는 일본어과 학생이었다. 거기서 탈반이라는 운동권 동아리에 들어갔고, 데모도 했지만 공연물도 상당히 많이 만들었다.
동아리에서 연기를 하다 문득 이걸 업으로 삼아야겠다 싶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극단 생활을 했다.”

 

– 연기를 하면 잘할 수 있겠다는 믿음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하다.

“이건 여담인데, 내가 삼남매 중 막내다. 그런데 우리 형하고 누나가 공부를 엄청 잘했다. 한
마디로 우리형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서 3학년 때 사시를 패스하고, 다시 하버드 법대에 들어가서 4개 국어, 5개 국어를 하면서
전교 일등 아니 전국 일등을 한 번도 놓쳐본 적 없는 수재다.”

 


– 혹시 말로만 듣던 엄친아?

“우리 누나도 거의 일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지금 형은 국제변호사고 누나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한다. ‘그래서 너는 뭐냐’ 문제는 그거다. 사실 많이 힘들었다.(웃음) 대인 관계도 좋고, 성적도 나쁘지 않고
괜찮았는데 집에만 가면 형의 반만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엔 방황도 많이 했지. 그러다 대학 동아리에서 탈춤을 추는데, 아
그게 재미있는 거야. 좋아해서 그런 건지 잘하기도 했고. 그래서 시작한 거다. 어차피 내가 하버드에 갈 수도 없는 거 아닌가?
내가 생각하던 삶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 그 후에 극단에 오래 있었다고 들었다. 영화를 찍기 시작한 건 연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인데, 영화를 찍게 된 계기가 있었나?

“<이른 여름, 슈퍼맨>이라는 단편 영화로 데뷔하고는 <마지막 늑대>에선
누가 소개시켜줘서 아르바이트로 영화를 찍었다.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영역을 넓혀가고 싶었던 욕심과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사실 경제적 문제가 젤 컸다.”

 

– 하지만 영화와 연극은 다르잖나. 예를 들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가는데 영화는 끊어서 가니까 연기하는 방식이 조금은 다를 것 같다.

“아직도 적응을 다 못했다. 처음엔 연기하다가 얼굴이 시뻘개졌다. 다른 사람은 다 연기하는데
나만 연극을 하는 거 아닌가. (낮게 목소리를 깔아서 사극 톤으로) ‘멈춰라, 이 더러운 것들아’ 이런 식인 거다.(웃음)
하지만 본질적으론 똑같다고 생각한다. 다른 학교에 전학 가서 적응하는 거랑 같다. 친화력 있는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잘
적응하는 거고, 이 동네에서 왕따면 저 동네에서도 왕따인 거고.” 

 

‘죽었다 깨도 못 앉을’ 의자에 앉다

 

그는 대학교 때 들어간 ‘희망새’라는 가요팀에서 아내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29살, 아내와 함께 서울예전 연극과에 재입학했다.

 

“실제론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그는 2년 전인가, 3년 전 결혼
기념일에 아내에게 2인극 대본을 선물로 주었단다. “너도 배우고, 나도 배우니까 언젠간 같이 2인극을 해보자”며 말이다. 무심한
듯 말했지만 그 속에서 아내에 대한 촉촉한 사랑이 느껴졌다.

 

그는 인터뷰 내내 때론 유머를 섞으며, 때론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진지한 아이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삶에 대해서 진지하지만 그 긴장의 끝에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힘이 <영화는 영화다>에서 코믹하지만 진지한
봉 감독의 모습 그대로였다.

 

– 영화 속 봉 감독과 어쩜 그렇게 똑같나. 혹시 봉 감독이 실제 모습이 아닌가?

“역할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겠지만 이번 영화에서 봉 감독이라는 역할은 특별히 더 소중한 것
같다. 장훈 감독이 시나리오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내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썼다고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영광이기도 하고, 연기하기도 편했다. 현상적으론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비슷할 수 있다. 적당히 정의롭고, 적당히 비겁하고,
적당히 내가 하는 일에 열정이 있고, 내가 하는 일 이외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봉감독이 나뿐만 아니라
작업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 영화 속에서 약간 능글맞으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미나씨 나 좋아해”라든지 “레~디 액숀!” 같은 명대사를 남겼는데 원래 말투가 그런가?

“옛날에는 별명이 ‘욕쟁이’었다. 악의를 가지고 욕을 한 적은 없겠지만, 입에서는 욕이
나왔다. 하지만 욕을 해도 신기한 게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한다는 거였다. 오죽하면 영국에서 몇 년 있다 온 후배가 날 보자마자
‘오빠 욕 한 번만 해줘’이러더라.”

 

– 감독을 연기한다는 것이 재미있었을 것 같다.

“감독 역이라고 해서 특별히 감흥은 없었다. 근데 현장에 가니까 좋더라고. 현장에 가면 ‘감독
의자’ 뿐만 아니라 ‘주연 배우용 의자’가 따로 있는데, 처음엔 죽었다 깨봐도 못 앉는다. 어느 순간이 돼야 자연스럽게 앉을 수
있는 건데, 처음부터 거기에 앉으니 좋았다. 주위에서도 나를 ‘감독님, 감독님’ 이렇게 부르고.(웃음)”

 

친구 같은 소지섭, 애인 같은 강지환

 



<영화는 영화다> 겉그림.
ⓒ 김기덕 필름

– 두 배우의 팽팽한 긴장감 사이를 오가면서 균형을 맞추는 봉 감독이 영화 속에서 크게 다가왔다. 어떤 연기를 하고 싶나?

“역할에서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봉 감독은 ‘기능적으로 미션이 분명한
역할’이다. 깡패 같은 배우와 배우 같은 깡패, 이 터질 것 같은 두 배우를 데리고 영화를 찍어라. 찍을 수 있게끔 하고,
거짓말이 아닌 것처럼 사실적으로 보이게 해라. 이 역할인 거다.

 

거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코믹하게 하라는 거다. 두 주인공은 항상 긴장 상태잖나. 두 시간
동안 어떻게 그렇게 긴장하고 앉아 있나. 내가 하는 역할이 요소요소에서 긴장을 풀어 주는 거다. 봉감독처럼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미션이 분명한 역, 그런 배역이 좋다.”

 

– 제작비가 총 15억이라고 들었는데, 그게 가능한가?

“올해 4월 5일 프로덕션 구성해서 9월 10일에 개봉을 했다. 채 6개월이 안 되는 시간
동안 구성에서 촬영·편집·개봉까지 다 한 거다. 배우와 감독이 모여서 첫 리딩할 때 장훈 감독이 그랬다. ‘저희들은 기본적으로
한 테이크 갑니다, 더 찍고 싶은 분들이 있으면 필름 사서 오세요.'(웃음) 진짜 정신없이 찍었다.”

 

– 그럼 다들 친해질 시간도 많이 없었겠다.

“사실 영화 찍는 동안 같이 술 한 잔 할 시간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이 영화가
개봉되는 과정까지 친밀한 유대감이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저예산 영화니 다들 개런티를 받았으면 얼마나 받았겠나? 그래도 무대
인사하면 모두들 시간나는 대로 달려온다.”

 

– 어떤 힘이 그렇게 똘똘 뭉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주술이라도 걸린 건지?

“그런 열악함이 서로를 묶어주는 것도 있을 것 같다. 일반적인 작업의 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사명감까진 아닌데, ‘한 번 해보자’라는 으쌰으쌰 한 마음이 있었던 거 같다. 어느 한 명이 한 건 아니다. 물론 그
구심점엔 감독과 두 주연배우, 배경으로 김기덕 감독까지 있었겠지만,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 같다.”

 

– 그럼 촬영장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을 것 같다. 

“처음엔 ‘소지섭이라는 배우는 까칠하다.’ 그런 이야기 들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웃는
게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게 지섭씨가 가진 매력이다. 낯을 가리긴 하지만 소지섭이란 배우는 진지하고 인간적인 거 같다. 사람
자체가 매력적인데, 그 모습이 영화상에 잘 드러나서 기쁘다.

 

지환씨 같은 경우는 톡톡 튀는 매력이 있다. 보면 참 캐스팅 잘했다. 영화처럼 지환씨가
건방지다는 게 아니라, 감독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섭씨는 친구 같고 지환씨는 애인 같다’고. 지섭씨는 든든한 느낌.
지환씨는 톡톡 튀는 매력. 거기에 둘 다 얼마나 겸손한지 모른다.”

 

“관객들에게 ‘공감’ 얻는 배우이고 싶다”


 



<영화는 영화다>에서는 영화 속에서 영화를 찍는다. 영화 속 영화 촬영장의 마지막을 장식할 갯벌 싸움씬의 한
부분이다. 깡패 같은 배우와 배우 같은 깡패는 이 장면을 찍을 때, 실제로 싸우기로 약속했다. 누가 이길 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사이에 눈치없이 끼어든 봉감독(고창석)이 느슨한 웃음을 안겨준다.
ⓒ 김기덕 필름

 

– 소지섭은 소지섭이고, 강지환은 강지환이다. 그렇다면 고창석은?

“관객들에게는 배우 고창석이 그렇게 어필이 안 돼도 좋다. 배우 고창석보다는 금자씨의 소영
남편. <바르게 살자>의 우 반장. <영화는 영화다>에선 봉 감독으로 기억되길 원한다. 그 인물로써
기억되는 게 배우로썬 중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봉 감독을 기억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고창석이라는 이름 앞에 뭐라는 수식어가 붙었으면 좋겠나?

“그 생각을 안 해봤네. 그게 중요한 건데.(잠시 생각에 빠진 후) 미션이 가능한 거, 어떤
역을 맡아도 잘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거기에 인간적인 배우였으면 좋겠다. 주인공이 슬퍼질 때 같이 슬퍼지고 기뻐할 때
공감이 간다는 거. 예를 들어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로베르토 베니니는 정말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이렇게 될 때 그
공감을 얻는 힘은 인간미라고 생각한다. 악역도 악역 나름의 공감을 얻어야 한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잖나.”

 

‘노래도 잘하고, 못하는 게 없을 것 같다’는 나의 물음에 “아니에요. 일단 뚱뚱하잖아”라고 대답하는 그였다. 그러면서도 “극단에서 여자 배우들이 뽑은 섹시한 배우 2위를 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가 썩어가듯 금방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결국 연기를 하기 위해서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다는 ‘천상 배우’ 고창석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출처 오마이뉴스

중학교 동창 창석이. 그때도 참 끼가 많았는데 결국 가야할 길을 잘 가고 있구나.

보고싶다.

남동생 지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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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부터 좀 다른애들이랑은 달랐던 막내 지철이(이하 지치리) … 대학때 컴퓨터 한대 달랑 들고 서울 올라가서 회사 차리더니, 어느덧 시간은 흘러 이젠 결혼하고 어엿한 유명 영상회사 과장.

힘든 나날들은 추억으로 남고, 나도 제법 자리 잡아가고 남동생 지철이도 그렇고, 그리고 알콩달콩 잘 살고 있는 지윤이에 가영이까지… 아버님 살아계셨으면 참 기뻐하셨을텐데.

오랫만에 블로그 갔더니, 무슨 영화배우 사진이 있길래 봤더니 지치리다. 다른건 모르겠고 두가지는 참 부러운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저 헤어스타일과 이번에 구입한 녀석의 벤츠.

녀석의 블로그

나훈아 형님.. 존경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형님. 저 뽕짝 아직 우습게 생각했습니다.솔직히… 하지만… 형님 카리스마 뵙고 나서.. 형님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형님 61세 맞으십니까? 제가 존경하는 형님이 이미 한분(보아boa님) 계신데… 그 다음으로 형님 존경하기로 했습니다.

형님이 부르시는 노래가 뽕짝이라면.. 그 노래.. 제가 기꺼이 무릎꿇고 따라 부르겠습니다. 형님. 꾸복..

(사족) 그냥 확 올라선 김에 까시지 그러셨어요.. 근데 아무래도 팬분들 땜에 좀 그러셨죠? ^^

조원장님 큰따님 에뮬리

사용자 삽입 이미지Canon EOS 5D | ISO 1000 | F 2.8 | Adobe Photoshop CS3

조원장님의 첫째따님이 졸업전에 한국에 오셨다. 부산서 올라오니 다음날 뉴욕으로 떠나신다나. 아쉬운 마음에 오리 불고기 쏘았는데, 맛있었다고 좋아한다.

에뮬리는 의대 공부중인데, 몇달있다 졸업예정. 하지만 힘든 10여년간의 인턴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원장님은 첫째딸이 너무 살이 빠졌다면서 걱정걱정… 한국이나 미국이나 자식사랑은 다 똑같나 보다.

뭐 해줄거 없어서 아이팟 터치 선물했더니 참 좋아라 하신다. 다음날 공항에 원장님이랑 함께 태워다 드렸는데, 원장님이랑 따님이랑 껴안고 눈물 펑펑. 그리고 눈도 펑펑.

과테말라에 한달동안 의료봉사 떠나는 착한 처녀. 무사히 다녀오시길…

일본의 보배 코미디언. 시무라 켄(志村けん)





사용자 삽입 이미지시무라 켄은 일본이 자랑하는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가. 키타노 다케시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코미디언. 키타노가 좀 어려운 하이코미디와 말주변을 자랑한다면, 시무라 켄은 철저한 서민개그와 슬랩스틱을 이용한 웃음을 만드는 코미디언.



다시 말해 키타노가 스탠딩 말빨개그쪽이라면, 시무라켄은 찰리채플린 스타일 이랄까. 어릴때 부산집에서 보던 일본방송에서 유일하게 우리가족을 웃겼던 사람. 그리고 당시(80년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성인개그(한국에선 방송불가 수준)까지 넘나들던 …



얼마전에 일본갔을때 그의 공연 DVD를 보고, 다시 그때의 향수가. 유투브에서 몇개 건진 그의 추억의 개그들을 보고, 한국에서도, 제발 엄숙주의에서 탈피해서, 코미디언들이 신나게 자기 재능을 눈치보지 않고 표현할수 있는 시대가 오길… (한국코미디언들도 시무라켄 못지않은 사람들이 많다).




거기는 편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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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테러리즘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테러에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노엄 촘스키와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에서,
오늘따라 눈에 띄는 대목이다.

가슴이 답답할 때는 위대한 학자이자 더 위대한 행동가인 이 노인의 낙관주의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올해나 내년은 아주 짧은 시간이다. 현재에 살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인간의 지속적인 활동을 믿는 것이 바로 촘스키의 신명나는 태도의 근간이다.”

– 은임씨 싸이에서…

거기는 테러같은것 없지요? 은임선배.. 벌써 3번째 기일이군요. 저는 당신때문에 영화를 알게되고 생의 진지함과 진실함을 배웠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단 한명도 세상을 바꿀수 있다 / 부산의 명물 할아버지 소개



산요 VPC HD2 촬영 / ViddyUp! 최적화


우리회사 빌딩 근처에는 부산의 명물 할아버지가 한분 계시다. 누가 시키지도 않으셨는데 비가 오나 눈이오나, 다양한 내용들이 적혀있는 팻말을 들고서는 버스정류장이나 혹은 길가를 방황하신다.


그분을 지켜본지 2년여..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드렸다. 촬영해도 되냐는 양해를 구한후에… 대화를 나누고 나서, 난 이분이 정신이 이상한 분이 아니라 <작은 시민운동>을 하시는 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에 이분에 대해서 몇번 더 다룰 예정. 혹시 부산에 오시는 분들 계시면, <부산진구 부전1동 외환은행 빌딩> 근처의 <팻말들고 다니시는 명물 할아버지>를 찾아보시라. 김두환 시절때부터 시작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다.

꽃잎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옥례(孫玉禮)

묘역번호: 1-80
생 애: 1961.05.20 ~ 1980.05.22
성 별: 여
출 생 지: 광주
사망 원인: M-16 총상 및 자상
사망 장소: 장소 불상
기 타: 학생(송원여고)
유 족: 손근섭(오빠)

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총상, 하악골 총상, 좌측골반부 총상, 대퇴부 관통총상, 우흉부 관통총상. 1980년 도청 앞 상무관에서 당시 합동수사본부 검시관들에 의해 작성된 사망자 검시서에 기록된 손옥례의 사망원인이다…


소문을 계속하던 끝에 동부경찰서에서 당시 사망한 사람들에 관한 신원정보가 검찰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광주지방검찰청에
가보니 가족이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들에 대한 사진 자료가 있었다. 아마도 검시할 때 찍었던 사진 중에 가족이 확인되지 않은
사망자들의 사진을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속에 옥례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하반신을 가리고 찍은 사진에서 옥례는
코부분이 일그러진 채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확인해보니 이미 망월동 묘지에 가매장되었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끔찍한 딸의 시체를 보고 그 자리에서 실신한 아버지는 그 이듬해 결국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떴고, 어머니 역시 딸과
남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반신불수로 살다가 1986년 세상을 떴다. 뿐만 아니라 손옥례의 오빠인 손병섭도 시내에 나갔다가
공수부대의 곤봉에 머리를 맞아 실신된 후 군부대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휴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5․18 민중항쟁 증언록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中에서

 http://www.raysoda.com/hyunreen

Robert Capa


로버트 카파 ( Robert Capa, 미국,  1913∼1954 )
During his short lifetime he photographed five wars.
그는 짧은 생애동안 다섯 차례의 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했다.

191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1931년   유태인 탄압을 피해 독일로 이주
1933년   파리로 이주
1935년   로버트 카파로 개명하고 본격적으로 보도 사진가로 나섬
1936년   스페인 내란 촬영
1938년   중일 전쟁 촬영
1942년   제2차세계대전 촬영
1945년   전쟁 종결후 미국시민으로 귀하
1947년   사진 통신사격인 ‘매그넘’ 결성
1948년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 독립전쟁 촬영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 촬영에서 지뢰를 밟아 폭사

카파의 사진은 그의 정신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진기는 단순히 그것을 완성시킬 뿐이다. 훌륭한 화가의 캔버스와 같이 카파는 대상을 어떻게 보며,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그는 전쟁 그 자체를 사진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격정의 끝없는 확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밖에 있는 것을 찍어 그 격정을 표현한다. 그는 한 아이의 얼굴 속에서 그 민중 전체의 공포를 나타내고 있다. <존 스타인 벡>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서 사라진 로버트 카파와 카파이즘

  우리는 전쟁 사진을 말할 때 로버트 카파를 빼놓고는 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카파 이전에도 많은 전쟁 사진가들(로저 팬톤, 알렉산더 가드너 등)이 있었고, 그 이후에는 뛰어난 많은 전쟁 사진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로버트 카파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그가 짧은 생애 동안 다섯 차례의 전쟁을 겪었으며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장터를 누비며 전쟁의 진실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전쟁 사진이라고 하지만 전쟁 사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한 가지는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전쟁을 선전하는 사진이 그것이다.

 사진의 발명이래 전쟁은 매스미디어의 가장 사랑받는 테마 중 하나였다. 대중은 전쟁 이야기를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의지가 극한까지 시험받는 전장에서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왔다. 이런 대중의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매스 미디어, 그리고 전시(戰時)에 대중을 통제하고 전쟁에의 의지를 북돋기 위해 지배 계급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전쟁을 홍보할 필요를 느꼈다. 이 양자의 이익이 결합하여 전쟁을 촬영한 보도 사진은 많은 수요를 필요로 했고, 그들의 편의에 따라 사용되기도 했다. 앞서 말한 로저 팬톤(1819-1869)의 경우 그의 본업은 변호사였고,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전형적인 신사였다.

 그가 촬영한 크리미아 전쟁은 모든 전쟁이 그러했듯이 많은 사상자를 발생케 한 전쟁이었다. 그랬음에도 그가 촬영한 사진들에는 죽은 병사의 시신 한 구 나오지 않는다. 야전병원에는 숱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는 주름잡힌 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찻잔을 들고 있는 전형적인 영국의 귀족 장교들만 촬영되어 있었다. 물론 노출이 10초에서 1분이나 걸리던 당시의 습판 콜로디온 감광 사진으로는 격렬한 전투장면을 촬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가 지나간 뒤의 풍경은 충분히 촬영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장면을 찍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장교들의 기념 사진 위주로 촬영한 데에는 분명 당시 그를 후원하고 있던 지배계급의 이해가 달려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그에게 내건 조건은 이랬다. “사체가 나오지 않을 것!”

이후 사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언론 매체에 보도되는 대개의 사진들은 자국의 승리를 찬양하고,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대중에게 쇼크를 줄 수 있는 그것이 분명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가차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런 일련의 움직임의 정점에 서 있던 사진가가 바로 로버트 카파이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품에서 어느날 갑자기 불려나와 이름도 모르는 언덕과 골짜기, 초원에서 사라져가는 현장을 지켰고 그들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에는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로 소개된 그의 책 <Sightly Out of Focus (1947)>는 종군기자를 꿈꾸었던 많은 젊은 사진작가들에게 바이블이 되었으며 그의 너무 이르고 극적인 죽음은 그를 종군기자의 신화가 되도록 했다. 이제 종군기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때라도 자신을 지배하려드는 매스 미디어와 정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려 들었다. 그것이 바로 카파이즘(Capaism)이다.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1936 – 이 사진의 감동은 구도나 표정, 배경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의 극적인 순간을 함께 하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현장성에 있는 것이다.

영원한 이방인이자 국외인(局外人)이었던 로버트 카파의 생애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점 중 한 가지는 그가 평생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본명은 앙드레 프리드만(Andre Fridmann)으로 1913년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 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 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 사진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Alfred Eisenstaedt)의 암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나 히틀러의 등장으로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다. 1933년에 그는 다시 파리로 흘러든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연인 겔다를 만나게 된다. 포르투갈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겔다는 카파에게 있어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이 무렵 그의 생활은 카파가 사진을 촬영해오면 동생 코넬이 암실 작업을 하고, 겔다가 원고를 들고 잡지사를 찾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36년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자 카파는 겔다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그는 평생을 종군 사진가로서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나버린 삶을 살았다.

 그는 스페인 최전방의 참호에서 혹은 적진 깊숙이 뛰어드는 병사들과 함께 했다. 그는 단순히 보도사진가로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회고록인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를 보더라도 그가 스페인 내란 당시 인민전선파에 대해서 정치적인 지지의 입장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 내란은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유럽의 지식인들의 절대 다수가 인민전선파를 지지했으며 실제로 의용군을 결성해 참전하기도 했다. 심지어 머나먼 동양(일본)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이 멀리 스페인까지 날아와 인민전선파를 지원해 의용군에 참전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스페인 내란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고, 심정적으로 공산주의보다는 차라리 파시스트들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파시스트였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프랑코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과 연인 겔다의 죽음

로버트 카파란 이름이 마치 종군기자 혹은 전쟁 사진 전문가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겪어내야 했던 시대적 상황이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사진의 주된 소재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전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것은 1936년 스페인 내란 중에 찍은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 Spanish Loyalist at the Instead of Death> 이었다.

 이 사진을 시작으로 로버트 카파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한 병사가 돌격하기 위해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을 보여준 이 사진은 마침 돌격하는 병사 가까이 있었던 로버트 카파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로 잡아냈고, 이 사진이 1936년 「라이프Life」지에 게재(이 해에 라이프지가 창간되었다)되면서 로버트 카파는 하루아침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병사의 죽음>은 후세에 연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기는  했지만 그것은 마치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이 너무나 리얼한 나머지 실제 사람의 본을 뜬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처럼 인위적인 연출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진으로 카파는 국제적 명성을 얻었지만 스페인 내란에서 자신의 아내 겔다를 잃고 만다. 그와 겔다가 아군 진지를 촬영하던 중 전선에서 후퇴해 온 아군 전차가 촬영 중인 겔다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겔다를 치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겔다는 빌드락, 장 르느와르, 피카소, 아라공, 말로, 니생 등에 의해 정성껏 장례를 치뤄 주었지만 겔다의 죽음에 상심한 카파는 반 달 동안 숙소에 엎드려 계속 울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평생 전쟁터를 떠돌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 겔다 타로 1935년 프랑스 파리. (Robert Capa and Gerda Taro) – photo by Fred Stein

로버트 카파를 덮친 다섯 차례의 전쟁

스페인 내란을 필두로 그는 1938년에 일어난 중일전쟁 때는 일본군의 잔학한 학살 참상과 비탄에 빠진 중국인들의 모습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카파는 그의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되어 카메라조차 뺏길 형편에 처한다. 그러던 중 <커리어즈>에 의해 채용되면서 극적으로 종군기자에 복귀하게 되는 행운을 만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장면을 촬영한 사진이 있는데 그때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사진이 떨린 상태이고 핀트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사진에서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더욱 절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제2차세계대전의 보도사진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1945년 그는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되었고, 1947년에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그는 이 무렵 존 스타인 벡과 함께 소련에 촬영여행을 간다. 1949년과 51년에는 피카소의 가정생활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평화는 잠깐이었다. 1948년부터 50년까지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취재하였고 1954년 풍물사진 촬영차 일본에 가 있던 중 <라이프>지의 요청을 받게 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The landing at Normandy, 1944. – 이 사진이 잡지에 게재되면서 사진에 대한 캡션으로 사용된 말이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1954년 카파는 일본의 한 신문사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었다. 그러나 <매그넘> 회원인 친구 잔 모리스가 뉴욕에서 그를 불렀다. <라이프>지에서 베트남 전세가 긴박해지자 카파에게 그곳에 가줄 것을 화급히 간청한 것이다. 카파는 베트남 행을 말리는 친구에게, “삶과 죽음이 반반씩이라면 나는 다시 낙하산을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로버트 카파는 41살의 젊은 나이에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와 베트남간의)을 촬영하던 중 지뢰를 밟아 폭사하고 말았다. 1954년 5월 25일의 일이었다.

로버트 카파의 죽음과 베트남 전쟁

로버트 카파는 전쟁사진을 단순히 보도하는 입장에서만 촬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그는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 대신에 인간의 내면 세계를 전쟁이란 상황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전쟁이라는 가장 급박한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평상시 자신의 가식된 모습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로버트 카파는 촬영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관찰자적, 보도자적 입장에서 단순한 기록성을 위한 사진이 아닌 전쟁에 직접 참여한 참가자로써 급박한 상황아래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카파의 사진이 지니고 있는 포토저널리즘의 한계는 베트남전을 통해 드러난다. 로버트 카파의 사진은 <라이프>와 같은 사진잡지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었다. 이런 잡지들은 카파와 같은 종군 사진작가들의 작품이 필요했고, 종군 기자들은 그들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필요로 했다. 자유와 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건 이런 잡지들은 먼 발치에서 찍힌 전장보다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찍힌 사진들을 원했고,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질수록 호응을 얻었다. 카파가 그토록 대중적인 인기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카파와 포토저널리즘이 그토록 옹호하려고 애썼던 자유와 휴머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붕괴되어 간다. 제국주의의 본질이 바뀌지 않은 채 자유와 휴머니즘이 마치 자신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주장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카파로 상징되는 포토저널리즘의 영웅 신화도 서서히 변질되어 간다. 이제 사람들은 거실에 앉아 전쟁터의 생생한 화면을 TV를 통해 지켜보게 된다. 이제 전쟁터는 관객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원형경기장이 되었고, 사람들은 잠시 TV를 넋놓고 바라보다 다시 낄낄거리며 일상 생활로 돌아간다.

 포토저널리즘이 애초에 전달하고자 하던 메시지는 점점 더 사라지고, 매체들은 더욱더 잔인하고 말초적인 장면을 포토저널리스트들에게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TV를 통해 전쟁을 생중계로 볼 수 있다고 해서 우리가 과거 ‘노출이 10초에서 1분이나 걸리던 시대의 습판 콜로디온 감광 사진’ 시절보다 전쟁을 좀더 잘 알 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에도 그러했지만 우리가 보도를 통해 보고 듣는 전쟁은 언제나 그만큼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거리에서 지켜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 앞에 드러내 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라는 종군기자들의 인류애에 불타는 이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나머지는 당신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양복점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난한 유태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7세 때 유태인 차별 정책과공산주의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온 로버트 카파는 정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조국에서쫓겨났고, 타국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의 이런 처지는 그로 하여금 세계 공통의 언어인사진의 세계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무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로버트 카파 – 그는 포토 저널리즘의 전성기와 매그넘 시대의 중간 가교 역할을 했다.


NamDinh, South of Hanoi, Vietnam, May 25th, 1954. -이 흑백 사진을 찍은 직후, 카파의 발밑에서 지뢰가 터졌고, 로버트 카파는 더 이상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로버트 카파는 유럽의 거의 모든 전선을 누볐다. 그리고 전선에서 산화했다. – photo by GeogeRodger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로버트 카파 지음/ 민영식 옮김/ 해뜸/ 1987년  – 로버트 카파는 사진만 잘 찍는 건아니었던 모양이다. 글도 잘 쓴다. “만약 당신의 사진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할 만큼그는 언제나 현장을 쫒았다.

『대표작으로보는 세계사진가들의 사진사상』/ 임응식 지음/ 해뜸/ 1986년  – 우리나라 사진계의 원로 작가이자 교육자인 임응식 선생이19세기말 20세기 전반기의 사진 작가들의 사진 경향과 생각(사상), 사진을 정리하여 글로 옮긴 내용이 담긴 책이다. 한 권으로여러 작가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다만 <해뜸>출판사의 책들이 대개는 수록한 사진도판들의 사태가썩 좋지 못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진 책 치고는 염가판이고, 그만큼 다양한 작가들을 다루고 있는 책이 많지 않다는점에서 한 번쯤 꼭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사진예술개론』-열화당 미술신서52<개정판>/ 한정식 지음/ 열화당/ 1997년  – 한정식 선생이 작심하고서 만든책답게 사진예술에 대한 개론서로서 가장 잘 정리되어 있다. 물론 사진 실기에 관한 책은 아니다. 사진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도참고삼아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진의 힘』/이이자와 코타로 지음/ 양수경 옮김/ 타임스페이스/ 1997년  – 이이자와 코타로의 책을, 나는 사진에 대한이론 공부를 위해 올해(2001년) 구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초판본이 배달되어 와서 깜짝 놀랐다. 그 놀라움은 크게 두가지였는데 한 가지는 <타임스페이스>측에서 이 책의 초판을 얼마나 찍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사진과 학생들도어지간히 공부 안하는구나 하는 사실에 놀랐고, 생각 이상으로 내용이 진지하고 좋았기 때문에 놀랐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진에 관한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그 중에 한 분으로 이경민 선생을 꼽고 싶다.

『전쟁과 영웅』/ 귀도 크노프 지음/ 이동준 옮김/ 도서출판 자작/ 2000년  – 이 책은 일단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책 제목이 원서의 제목과 너무 차이가 있고, 그나마 제목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으며군데군데 오탈자가 너무 많다. 교정이나 번역상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러나 재미있다. 가령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많이 보아온사진들에 대해서 그 사진이 찍히게 된 이면사를 알려주고 있다. 또한 <유황도에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병사>들처럼연출된 사진과 그 사진에 찍혔던 인물들의 그후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상식 밖의 예술사』/ 정윤 지음 / 새길/ 1995년  – 예술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통해 느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읽다보면 상식도 늘고 예술이란 게 복잡한 이론을 늘어논다고 해서 알 게 되는 것이기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느끼고 해석할 것인가?의문제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대중적인 예술사 입문서적이다.

『민중미술,모더니즘,시각문화』/ 성완경 지음/ 열화당/ 1999년  – 미술평론가가 말하는 사진이란 어떤 것일까? 인하대 교수로재직하고 있는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은 그의 명성에 비해 발간된 책의 수가 아주 적은 인물이다. 그가 오랫동안 여기저기발표되었던 글을 엮은 것이 이 책인데 그만큼 주제가 나뉘어져 있기는 하지만 읽는 재미는 전혀 부족하지 않다.

 MOPA – 일명 MOPA라고 해서 샌디에이고 사진예술박물관을 인터넷상으로 옮겨 온 사이트이다.(영문)

 A Web Biography of David Seymour – 국제사진센터(ICP)의 홈페이지이다. 로버트 카파의 간략한 전기와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가 있다.(영문)

 보체스터 아트 무제움 – 로버트 카파에 대한 일대기를 충실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사진의 양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그외에도다양한 아티클들이 있다.(영문)

 매그넘– 로버트 카파나 브레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매그넘(MAGNUM)이야기를 빠뜨리면 이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매그넘도 이들을기념하고 있다.(영문)

 로버트 카파– 로버트 카파의 고국인 헝가리 사이트입니다. 사진의 양은 제법 되지만 상태는 썩 좋지 않습니다.(영어 지원 됩니다.)

 스페니쉬 컬춰 사이트– 사실상 링크만으로 이루어진 로버트 카파 페이지이다. 로버트 카파가 최초로 명성을 얻은 곳이 바로 스페인 내전인 탓인지 스페인내전 관련 사진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영문)

출처 : http://windshoes.new21.org/photo-capa.h

인간 김미현


미현이는 나보다 두어달 더 먼저 들어온 선배. 나이는 30대 초반. 일하는거 확실하고 똑똑하고 참 착하고 사리분별 바른 친구. 그리고 일도 잘하고 돈도 잘 벌고…. 어디 흠잡을데가 전혀 없다.

근데 결정적으로 이친구 아직 애인이 없다. 그렇다고 눈높은건 절대 아니고, 그냥 믿는 사람이면 된단다. 전국에 정말 괜찮다고 생각하는 믿는분들 계시면 메일주세요. 연결시켜 드릴께.

정말. 진짜로. 장난 아니구.

인간 이주원


주원씨는 이쪽일을 하게 되면서 우연한 술자리에서 알게된 분. 이분과 대화를 하다보면 <화초>같은 사람이란 느낌이… 무욕과 자족하는 삶을 추구하면서 사는 참 조용하고 아름다운 사람.

주원씨. 같이 성공합시다. 그리고 살좀 쪄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