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는 어떻게 역도산이 되었나,

징하다, 악바리! <역도산> vs 설경구

역도산. 한 고개라면 넘겠다. 둘이라도 넘어볼 만하다. 하지만 이 산으로 가는 길은 한두 고개를 넘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역도산. 조선이름 김신락, 17살에 현해탄을 건너와 ‘조센진’이라는 과거를 지우고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러이자 전후 일본의 영웅이 되었던 사나이. 100kg에 가까운 거대한 몸 만들기, 카메라 트릭이 허용되지 않는 프로레슬링 훈련, 영화 전체에 깔리는 일본어 대사 소화, 그리고 실존 인물이라는 부담감까지. 산 넘고, 물 건너서, 바다 건너서, 이 험난한 지옥의 라운드를 거쳐 설경구는 어떻게 역도산이 되었나. 아니 역도산은 어떻게 이 괴물 같은 배우의 몸을 통해 부활했나.

양수리 영화촬영소에 만들어진 사각의 링으로 어슬렁어슬렁 설경구가 걸어온다. 숙련된 프로레슬링 선수들도 하루에 20분 이상 안 한다는 레슬링 경기를 3분이 넘게 몇번씩 해댔던 전날의 촬영.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겨우 소주로 달래고 잠이 들었던 참이다. 하지만 카메라 롤링이 시작되자 “아~~~ ㅤㅆㅑㅤ~~” 포효하며 140, 150kg가 넘는 거인들을 패대기친다. 날 듯이 뛰어올라 ‘가라테 촙’을 날린다. 상대편의 반격이 시작되고 링 모서리 기둥에 꺼꾸로 박힌 역도산의, 아니 설경구의 머리통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진다. 뜨끈한 피가 눈으로 흘러들어가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 되어버린다. 그것이 가짜피라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분장을 수정하기 위해 링 위로 오른 일본인 스탭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피칠갑을 된 채 포효하는 설경구의 눈에는 이미 다른 영혼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링 밖으로 날아가는 발길질, 철제의자로 머리를 내리치는 과격한 액션, 어제보다 조금 더 힘들고, 디테일한 시간들이 ‘컷’ 소리와 함께 끝나자, 링에서 내려와 모니터 앞에 앉은 설경구는 최고점까지 솟구쳐오른 기운을 미처 가라앉히지 못한 채, 씩~씩, 가쁜숨을 내쉬고 있다.

“인터뷰는 다음날 할까요?”
“그래..그래요… 지금은 뭐라도 다 씹어먹어버릴 것 같으니까….”

언뜻 살기(殺氣), 그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근접하지도 뛰어들지도 못할 것 같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며칠 뒤면 <역도산>과 설경구 사이, 결국 홀로 치러낼 수밖에 없었던 그 길고 고된 경기의 첫 라운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1라운드 . 차승재 vs 설경구
“그래 할게, 씨발, 내가 하면 될 거 아니야”

안 한다고, 죽어도 못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역도산> 시나리오를 던져줘서 읽긴 했지만 이건 도저히 자신이 할 수 없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할 건 안 봐도 뻔한 거지. 뺑이칠 게 너무 분명하잖아요. 덜컥 하겠다고 했는데 책임을 못 지면 어떡해요. 단기간에 살을 찌우는 것도, 레슬링을 배우는 것도, 대사가 죄다 일본말인데 그걸 마스터한다는 것도 미친 짓이고, 설사 일본어를 배운다고 해도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는지도 미지수고, 뭐 하나 자신있는 게 없더라고. 게다가 <카라>로 망한 송해성 감독, <파이란>으로 겨우 일어섰는데 나 때문에 다시 <카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잖아.” (웃음)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지 “설경구가 역도산이라며?” 하는 소문이 충무로에 퍼졌다. 이미 설경구의 차기작은 <역도산>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갔다. “아주 발목을 잡으려고 여기저기 다 이야기를 하고 다녔더라니까….” 송해성 감독에게도 설경구는 절대적인 선택이었다. “솔직히 드라마틱한 역할이다보니까 탐내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역할이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거나, 몸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슴속에 뭔가 울분이나 악마성이 없으면 힘든데, 그렇게 놓고보니까 설경구밖에 대안이 안 보이더라고요.” 오히려 <오아시스>를 본 일본쪽 프로듀서 가와이 신야만이 “연기를 떠나서 저렇게 마른 사람이 어떻게 역도산 역을 하겠냐”며 걱정을 했다. 하지만 차승재 대표는 “걱정마라, 걔는 하면 한다. 조만간 역도산 몸이 되어 나타날 거다”며 장담을 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도망다녔지만 더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너 안 한다면 차선책은 내가 하는 건데… 이미 사전에 십몇억 깨졌어. 너 아니면 영화 엎어야 돼….” 협박 아닌 협박이 오갔다. “하루는 한다 안 한다를 놓고 차승재 대표와 길게 술을 마시는데 그 덩치 큰 사람이 술에 취해 불쌍하게 쪼그리고 자고 있더라고….” 아, 징글징글한 양반. 그동안 한번도 무리한 부탁을 안 했던 이 사람이 이토록 강력하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래 할게, 씨발, 하면 될 거 아니야.” 물론 그 말을 하면서 울었던 사실은 죽어도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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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도 말이 뭐가 필요해, 이제부터는 감정이다!”
2라운드. 일본 vs 설경구

2003년 말, <실미도> 관련해 설경구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사무실로 그의 일본어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피나게 공부해놓고 밤새 TV 봤다고 뻥치는 얄미운 모범생처럼, 그는 이미 <역도산> 준비를 차근차근 해오고 있었던 참이다. 평생 ‘조센진’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남자. 가까운 부인이나 비서 앞에서도 절대 한국어를 쓰지 않았던 독종. <역도산>에서 설경구가 한국말을 하는 장면은 죽기 전 병원에서의 몇 마디뿐이다. 가장 큰 부담이었던 일본어 연기를 놓고 제작팀은 “안 되면 더빙하자”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이 ‘알고보면 모범생’의 자존심에는 기도 안 찰 이야기였다. 그렇게 3개월간의 알찬 국내 교습을 받긴 했지만 그의 일본어가 일취월장한 것은 바로 일본에서의 몇달간이었다.

2004년 초 모리오카에서 벚꽃장면을 찍고난 뒤 촬영이 없었던 한달간은 솔직히 조금 긴 기다림의 시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설경구에게는 없어서 안 될 귀중한 시간이었다. “일본 배우들 만나서 리딩을 딱하는데, 그냥 이 생각밖에 안 나는 거야. 아… 좆됐다….” 자신의 대사 때문에 촬영이 딜레이되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떤 날 밤에는 설경구가 일본어로 대사를 쳤는데 상대배우가 “어? 뭐라고요?”라고 묻는 식은땀나는 꿈을 꿀 정도였다. 그렇게 두달이 넘도록 일본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국말은 내가 들리니까, 내가 확인할 수 있는데 이건 내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할 수도 없잖아요. 신마다 통역하는 친구들이 듣고 오케이를 내주어야지 안심이 되었죠. 정말 끔찍할 정도의 스트레스였어요.” 그러나 스스로 “운이 좋아도 이렇게 운이 좋을 수 없는 배우”라고 말하는 설경구에게는 든든한 선생님들이 나타났다. 바로 나카타니 미키와 하기와라 마사토였다. 역도산의 평생의 연인이었던 아야 역의 나카타니 미키(<링> 시리즈의 그 여배우!)는 “언제라도 불러달라”고 “스케줄 빼고 달려오겠다”고 말해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역도산의 옆을 지켰던 비서 요시마치 역으로 출연하는 하기와라 마사토(<큐어> <막스의 산>의 그 배우!) 역시 극중 요시마치처럼 매 순간 설경구의 가장 든든한 일어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다 은인들이죠. 역시 배우들에게 배우는 일본말은 좀 다르더라고요.” 그들은 단순히 의미의 전달뿐 아니라, 감정적으로 디테일한 부분까지 지적해주고, 하나의 표현에도 여러 방법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 근데 이게, 이러면 될 것 같은데 조금만 다르게 말해도 미묘하게 다른 표현이 되어버리더라고요. 그러면 틀렸다고 큰소리로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앞에서 “으~응~”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요. 그 “으~응~”을 몇번 반복해서 듣다보면 너무 약이 올라, 너 한국말 해봐 씨발,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니까.” (웃음)

하지만 촬영이 가까워오자 설경구는 이 진귀한 ‘일본어특강’을 딱 끊어버렸다. “말투까지 쫓아갈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내가 연기하는 건데, 자꾸 누군가에게 배우다보면 그 사람의 말투에 갇혀버리겠구나,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좆도 말이 뭐가 필요해, 이제부터는 감정이다! 라고 밀고 나갔죠.” 물론 이런 ‘똥배짱’도 그간의 고된 트레이닝을 통해 어느정도 붙은 자신감이 아니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감독님에게 긴 대사라고 해도, 혹시 중간에 틀리거나 해도 짜르지 말고 일단 찍어보자고 했어요” 특히 역도산의 후원자인 칸노 회장 역으로 출연하는 후지 다쓰야(<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에서부터 최근작 <밝은 미래>의 그 배우!)와의 신들은 대부분 원신 원컷으로 처리했을 정도다. “후지 다쓰야는 워낙 대배우다보니 촬영 전에는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칸노와의 모든 신들이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찍다보면 서로의 감정이 올라와서 그런지 한번에 가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마스터컷을 찍고 나중에 클로즈업을 따놓기도 했는데, 현장편집을 해보면 왠지 어색해. 결국 통으로 쓰는 게 감정상 좋고 자연스러울 만큼. 결국 배우들끼리는 백마디 말보다 눈으로 소통한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느껴지는 게 있더라고. ” 스탭들에 따르면 설경구의 일본어 대사로 인한 NG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촬영장에서 일본 스탭들과 일본어로 나누는 대화를 들어봐도 설경구의 말투와 느낌은 한국말을 할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툭툭 내뱉듯이 던지는 농담, 길지 않은 문장. 그러나 그의 짧은 한마디에 모두들 웃게 만드는 태도에는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

제 3라운드. 체중 + 프로레슬링 vs 설경구
“가라! 누구든 씹어먹을 것 같으니까…”

전설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몸을 만드는 것은, <공공의 적>에서처럼 나태한 생활과 과식을 비결로 뒤룩뒤룩 살을 찌우면 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거대하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만들기 위해 한시라도 근력운동을 쉴 수가 없었고, 보라매공원을 홀로 달리며 일면식도 없는 사자(使者)와 싸워나가야 했다. “뭐 로봇도 아니고 하루종일 운동만 하지는 않았어요. 놀고 싶으면 놀고 어떤 날은 하루종일 탁구만 치기도 했다니까. 사람들한테, 사실 이거 탁구영화야, 하면서.” (웃음) 하지만 본격적으로 레슬링 훈련에 들어가자 낙법에 누르기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어이, 나 죽겠네”라는 말이 입에 붙어서 어느 누가 말을 걸어와도 일단 “어이… 나 죽겠네”부터 시작했다. <오아시스>에서 설경구는 “재수없을 만큼” 삐쩍 마르게 만들어버렸던 이창동 감독이 태산만한 덩치로 바뀐 설경구를 보고 “뭐야 이거? 도대체 뭐야 이거?”라고 놀랐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그래도 이창동 감독님이 왠지 양아치 냄새가 나는 게, 그럴듯하다면서, 느낌이 좋다고 하시더라고.”

물론 기본적인 합을 맞추고 들어가긴 하지만 링 위에서의 레슬링 경기는 거의 실제 경기를 방불케 할 만큼 육탄전의 연속이었다. 설경구를 제외하면 모두 실제 레슬링 선수이고, 아즈마나미 역의 하시모토 신야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이 멤버가 도쿄돔에서 레슬링을 하면 티켓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일 정도의 호화 캐스팅인 것이다. 동시에 아마추어 선수 설경구에게는 제삿날을 받아놓은 캐스팅이기도 했다. “얘들이 다 진짜 선수들이라서 손이 돌덩이예요. 그 돌덩이로 어깨 한번 짓누르고 머리 한대 치면 와, 나 죽는 거지. 숨이 억억 막혀. 그래서 ‘모이카이’(한번 더)!가 제일 무서워. 다시 하라면 안 할 수도 없는 문제고. 죽을 것 같아도 그냥 참고 가는 거지. 한번 더하면 더 죽을 게 뻔하니까.” 골절은 기본이고 거친 싸움이 시작되면 예상치 못한 일들도 벌어지는 경기였다. “배우는 혼방(진짜)에서 잘하는 거야. 슛 들어가면 진짜 잘할게요”라며 꾀도 많이 부렸지만 실전의 시간은 빨리도 다가왔다. “긴장을 하다보니 절대로 안 들릴 것 같은 사람들이 들리더라고요. 관객이 본다면 한 50kg은 덜 나가는 작은 사람이 그 큰 사람들을 들기만 해도 시각적인 효과는 충분하거든요.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로 갈수록 벌떡벌떡 들리더라니까. 이무라(후나키 마사카즈)는 나한테 얼마나 맞았던지 분장을 지워도 지워도 안 지워지기에 자세히 보니까 정말 시퍼렇게 멍이 든 거였대요.”

며칠에 걸쳐 진행된 이 ‘징한’ 레슬링 경기장면을 지켜보던 후지 다쓰야는“단 한번의 불평없이 묵묵히 하고 있는 배우와, 그런 연기를 묵묵히 시키고 있는 감독과, 이 모든 일들이 묵묵히 일어나고 있는 한국 영화현장을 보며 자신은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 회식자리에서 이 초로의 신사는 “설경구라는 배우를 존경하게 되었다”라며 가슴 벅찬 고백을 던졌다. “레슬링을 3분20초 동안 쉬지 않고 하고나면 게거품이 나온다니까. 사는 게 이게 뭐야 하는 생각도 들고. 한판 끝나고 나면 누가 오든지 다 씹어먹을 것 같고, 싸먹을 것 같다니까요. 정말 골병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긴장을 하고 있어서인지 아픈지 모르겠어요. 아마 촬영 끝나고 나면 좀 앓을 것도 같아요.

4라운드 . 역도산 vs 설경구
“내가 재연 배우야? 나 역도산 몰라”

‘일본, 역도산’이라는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 배달이 될 정도로, 천황 아래 역도산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역도산은 전후 일본사회의 가장 중심에 섰던 남자다. “그전에도 그 이후도 역도산만한 슈퍼스타가 없었을 정도”다. 그러나 한국 관객에게 역도산은 거의 가상의 인물 수준으로 알려진 바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한번도 실존 인물을 연기해본 적 없는 설경구에게는 역도산이란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촬영전에는 역도산을 잊어버리자, 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에는 마이너스다라고.” 그래서 스탭들이 실제 역도산 사진을 들고 어슬렁거릴 때면 “야! 씨발, 사진을 왜 들고와, 내가 재연 배우야? 나 역도산 몰라. 나 역도산 연기하는 거 아냐, 역도산 이름만 따온 거야. 몰라?”라고 호통을 쳤다. 괜한 화가 스탭들에게 미쳤지만, 어쩌면 이것은 설경구가 본인을 향해 내지르는 과격한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자료를 주었지만 대부분 읽지 않았다. “아는 게 병이 될 것 같아서”였다. 다만 레슬링 장면이 담긴 비디오만 보았을 뿐이었다. 히로시마 촬영 때 본 자료화면에서 처음으로 그가 신경안정제같은 약으로 그 짧은 생을 지탱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통 이 인간의 정체를 모르겠더라고. 센 사람, 나쁜 사람인 것 같다가도 고향, 나라도 없는 신세가 불쌍하기도 하고, 굵고 짧게 살다간 인생이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지 맘대로 살았냐 하면 그렇게 산 것 같지도 않고, 고독하고 외로운 건 나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원래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아닌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실존 인물을 따오긴 했지만 시나리오는 가상의 일들이 더 많았다. 아야도, 칸노도 영화 속에서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었다. 역도산이 아니라, 설경구가, 내가 일본에 가서 레슬링을 한다고 생각하자, 새로 만들어가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자, 고 몇번이고 되뇌었다. “모사꾼에 신사, 야비한 짓도 많이 했고 술만 먹으면 싸움질이고, 완전히 꼬여 있는 사람이었죠. 게다가 욕심도 끝이 없어. 하지만 어떻게 잡은 권력이고 어떻게 올라간 자리인데 그걸 놓기란 쉽지가 않았을 거라고. 나라도 못 놨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반골기질이 있어서 하지 말란 일은 더 했던 사람이더라고. 그 점은 나랑도 비슷하지. (웃음) 역도산이 야쿠자인지 누군가의 칼에 찔려서 병원에 누워 있다가 결국 복막염으로 사망했거든. 그런데 가장 유력한 사인이 사이다 때문인 것 같다, 고 하더라고. 원래 콜라, 사이다 이런 걸 병적으로 마시던 사람인데 배가 그 꼴이 된 상태에서도 남들이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기어이 꾸역꾸역 사이다를 마셨나봐. 그 비서가 쓴 책을 보면 그냥 ‘사이다 드세요’ 했으면 안 드셨을 텐데, 후회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점차 공통점을 찾아가긴 했지만 설경구에게 역도산은 처음부터 살가웠던 존재는 아니었다. 그 속을 파보면 고름투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외양상으로 최상의 계층을, 기득권을 연기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옷들도 얼마나 좋은데요.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의상비 다 합쳐도 역도산 양복 한벌 값이 안 될걸요. 이창동 감독이 자기 잠옷 가져다주고 스크립터가 아버지 몰래 빼온 잠바 입고 출연했던 거에 비하면 정말 부유한 역할이죠. 나중엔 내가 좀 즐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다가 내 위에 누가 없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도 하고, 어찌나 기름이 흐르는지 닦아도 딱아도 번들번들해.” (웃음)

어느덧 설경구가 내뱉는 모든 대답 속에는 그와 역도산이 혼재되어 있었다. “내가…”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시나리오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설경구가 그랬다는 말인지, 역도산이 그랬다는 말인지 헷갈릴 정도다. 후지 다쓰야는 그런 설경구를 보며 “나는 설군이 역도산의 좋은 모습만 받아들였으면 좋겠네. 야비하고 폭력적인 모습 말고, 그 사람의 정신이나 굳은 의지 같은 좋은 기운들만 기억해주게”라며 염려했다. “그런데 그게 잘되나, 이미 내 속에 그 인간의 나쁜 기운들까지도 많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예요. 어쩌면 원래 내 속에 있는 사악한 기운들이 솟구쳐올라온 것일 수도 있고, 나 원래 착한 사람 안 좋아하는데, 역도산도 ‘한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이 어딨냐’고 하잖아요. 그게 좋더라고.”

송해성 감독은 서서히 역도산에 몰입해가는 설경구를 보며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던 것이 옳았음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매신, 설경구가 하는 연기를 보면서 저놈 참 나쁜 놈, 저놈 참 불쌍한 놈. 설경구가 웃으면 기뻐지고, 설경구가 울면 슬퍼지더라고요. 지금은 설경구가 하지 않은 역도산을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예요. 이렇게 자주 감정적이 되었던 영화는 처음이었을 만큼.” 또한 스탭들은 “설경구 선배를 보면 미안해서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 고생을 하고 나서도 숙소로 돌아가면 20, 30kg이 넘는 역기를 들고 나서 주무시더라고요. 정말 투혼의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투혼(鬪魂). 이 닳고닳은 수식어가 배우 설경구가 만나니, 혼을 던져버린다는 그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역도산, 서른아홉에 죽었는데 참 바쁘게도 달려왔던 사람이었어요. 이제 이 촬영 5일 남았는데 역도산 인생만큼이나 바쁘게 달려왔던 것 같아. 치열하게… 전쟁터 같았어….”

마지막 라운드
설경구, 역도산을 껴안다

양수리 종합촬영소 앞 여관. 설경구는 전날 레슬링 장면 촬영으로 천근만근 같아진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갑자기 마지막 병원신 대사가 뭐였지? 하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집어든다.

“…긴타로, 우리 고향에선 말이다. 사람들이 참 많이 웃었다…. 형들하고 난 농담을 섞지 않으면 얘기를 안 할 정도였다. 우리 오마니 농담도 대단했지. 그런데 일본에 왔더니, 웃을 일이 없더라. 아이, 웃어서는 안 되겠더라구. 가난한 조센진이 뭐가 좋아서 웃고 다니냐고 욕하는 거야. 그래서 난 결심했다. 성공하자.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 아니 웃으려면 성공하자. 일본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 그 때까진 웃지도, 울지도 말자….”

영웅의 초라한 마지막,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사후엔 상속세도 내지 못했던 이 남자의 삶이 “너무나 허무해서” 그렇게 설경구는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여름 아침, 좁은 여관방, 숙취에 시달리던 서른일곱의 한 남자배우가, 서른아홉에 타국에서 죽어간 한 프로레슬러의 마지막 이야기 앞에 수건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경구와 역도산, 두 사람은 42년 만에 끝내 만나버리고야 만 것이다.

“… 그런데 이 기사 제목이 뭐예요?.”
“음… 설경구는 어떻게 역도산이 되었나 … 뭐 이 정도…?”
“되긴 뭐가 돼. 안 됐지.”

그렇다. 설경구는 역도산이 된 것이 아니었다. 천만번의 라운드를 거쳐서 설경구와 역도산이 서로 껴안아버린 것이다. 승부를 낼 수도 없이 그렇게 링 위에서 징하게 뒹굴어버린 것이다. 결국 오는 12월에 우리가 만나게 될 <역도산>은, 40여년 만에 무덤에서 끌어올려진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다큐멘터리도, 상처투성이 앞얼굴도 아니다. 설경구라는 필터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어진 한 고독한 남자의 초상, 그 비열하고 허무하고 서러운 뒷모습이 될 것이다.

글 백은하/ 자유기고가 lucielife@paran.com
사진 이혜정 socapi@cine21.com
사진제공 싸이더스
출처: 씨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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