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특별기고2] 당신들은 성문헌법 수호자였거늘…

무릇 사람위에 법 없다 했거늘…그들은 왜 이런 바보짓을 했을까?

[도올 김용옥 특별기고]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을 통박함 ②

헌법재판소가 지난 21일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자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그동안 대통령 탄핵, 총선, 남북문제, 행정수도이전 등 주요 현안과 관련, 날카로운 분석으로 관심을 모았던 도올 김용옥 전 중앙대 석좌교수의 헌재 비판 글을 싣는다. 오늘은 26일자에 이은 두 번째 글이다… 편집자 주


헌법재판관들. 위 왼쪽부터 권성·김경일·주선회·이상경 재판관 아래 왼쪽부터 송인준·김효종
재판관·윤영철 헌재소장. ” tt_link=”” tt_w=”504px” tt_h=”318px” tt_alt=”” />

자아! 사람위에 법없다 함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과 법! 이것은 고래 성현들의 말씀으로부터 인간세의 두 기둥으로서 줄기차게 논의되어 왔던 우리문화전통 속의 개념이다. 『논어』 「위정」편에는 정령(政)과 형벌(刑)로써 정치를 하면 사람들이 면하기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고(民免而無恥), 덕(德)과 예로써 이끌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있을 뿐 아니라 반듯해진다(有恥且格)라는 말이 있다.

모든 고대사회의 법이라는 개념이 민법적 개념이 박약하고 주로 형법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 『논어』의 유명한 공자의 말은 유가철학 전통을 법가철학 전통과 대비되는 것으로 인식케 만드는 근거가 되어왔다. 유가의 전통이란 바로 정령이나 형벌과 같은 법에 대하여, 덕(德)과 예를 인간세 통치의 질서근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에 전통적으로 법치주의란 말에 대하여 덕치주의·예치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덕과 예는 오늘날의 법률용어로 말하자면 관습법(Gewohnheitsrecht)의 대표적인 것이다. 입법기관의 법정립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사회생활 속에서 관행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법으로서 대부분 성문법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적인 중국학계에서는 예치·덕치라는 말을 별로 쓰지 않는다. 『중국정치사상사』를 쓴 샤오 꽁취앤(蕭公權) 선생의 개념정립 이래 ‘인치'(人治)라는 말을 주로 쓴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仁)이며, 인의 정치(仁政)는 곧 인치(人治)라는 것이다. 덕과 예라는 말은 성문법의 하위개념으로 인식될 우려가 있고, 인(仁)이라는 개념이 규범적으로 또 다시 실체화될 우려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인치(仁治)는 예치가 아니라 인치(人治)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실체적 고착성도 허용될 수 없다. 오로지 사람! 사람이라는 총체적 인격체야말로 법에 선행하며, 항상 법에 우선하며,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위에 법이 없다 함은, 바로 유가가 법가와 싸우며 지키려고 노력해왔던 유구한 인치(人治)전통의 한 측면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관습헌법은 불문헌법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

헌재 재판관들이 결정문 속에서 불문헌법과 관습헌법을 거의 동의어로 쓰고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로도 그들이 얼마나 헌법에 무지한 자들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법률용어로서 관습(Custom)이나 관습법(Customary Law)이라는 말은 있으되, ‘관습헌법’이라는 말은 별로 용례가 없다.

[#M_ more.. | less.. |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불문헌법(Unwritten Constitution)과 관습헌법(Customary Constitution)은 일치될 수 없는 것이다. 관습이 불문헌법의 많은 참고자료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나, 관습이 성문헌법을 뒤엎는 권위를 지닐 수 있는 헌법의 지위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습헌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가능한 법률용어이며 넌센스에 속하는 것이다. 멍청한 헌재 재판관들이 ‘관습헌법’이라는, 법률학 사전에도 없는 말을 지어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그들의 편협한 법지식 체계 속에서는, ‘불문헌법’이라 할 때 ‘불문’의 실제내용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문과 관습은 철학적으로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관습헌법이라 할 때 이 말의 존재론적 의미는 곧 헌법이 관습으로서 실체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문헌법의 근본정신은 법의 실체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이미 실체적으로 고착된 것이다. 관습이 불문헌법의 한 레퍼런스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관습헌법은 불문헌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가 편협한 예치를 말하지 않고 본질적인 인치(人治)를 말하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관습헌법은 존재(Being)의 세계며 불문헌법은 생성의 세계다. 관습헌법은 고착된 실체의 세계이지만 불문헌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세의 실상에 대해 고정적인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치는 존재의 세계며 인치는 생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사람위에 법이 없다는 말은, 사람이라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에 대하여 법이라는 고정적 존재자가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생성체를 도외시한 법이라는 존재자는 없다는 것이다.

법이란 근원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헌재의 결정은 이러한 철학적 성찰도 없이 마구 “불문헌법 내지 관습헌법” 운운함으로써 바로 우리나라 실정법 체계의 모든 근간을 흔들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이라는 특정한 인격체의 행위를 제어하기 위하여 바로 그들이 서있는 법질서, 바로 그들 존재의 존립근거를 붕괴시킨 것이다.

왜 이런 바보짓을 했는가? 왜 앞장서서 무리한 총알받이 노릇을 자처했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 자신이 뭔 짓을 하는지를 스스로 몰랐기 때문이다. 역사와 법률과 철학에 대해 근원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다. 무지한 자들일수록 용감하다.

자아. 이제 우리는 동학혁명이래 우리민족의 끈질긴 민본(플레타르키아)의 열망의 구조적 성취를 좌절시킨 을사오적 아닌, ‘갑신칠적(甲申七賊)’으로서 권세의 애사에 빛날 일곱 판관의 이름을 기억하자! 윤영철, 이상경, 주선회, 김경일, 권성, 김효종, 송인준! 이 슬픈 일곱 이름이 이 땅의 자손만만대로 불명예스러운 귀감의 가치를 전하도록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그리고 법이라는 권력을 남용하여 낭독하는 그들의 판결문이 이 땅의 영원한 정의의 판결의 대상이 된다는, 우리 민족 양심의 불꽃으로써 타오르고 있는 불문헌법의 원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자!

윤영철, 이상경, 주선회, 김경일, 권성, 김효종, 송인준, 이 ‘갑신칠적’의 만행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위에 법없다는 명제의 확인이다. 이것은 곧 제도에 인간이 우선한다는 유가의 인치주의의 근본원리를 우리에게 새삼 천명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합리적인 제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이 잘못되면 그 제도는 영원히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치에 대해 인치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 민족문화의 유구한 전통이다.

‘갑신칠적’ 일곱 판관의 이름을 기억하자

공자는 말했다: 법으로 인간을 다스리면 면할 줄만 알지 수치와 염치를 모른다(免而無恥). 물론 인치의 한계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법치가 인치를 제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인간은 모면키만 하는 인간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반듯하고 떳떳한 인간이다(有恥且格). 천하의 광거(廣居)에 거하며, 천하의 정위(正位)에 입하며,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하는 인간이다.

노무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를 지망하는 수 없는 법률가들에게 내가 우려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암암리 법이 실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제도에 대한 환상이 있다. 합리적 제도만 정립이 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가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물론 제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인간이 도외시되고 있는 것이다.

행정수도이전이라는 민족의 중대사가 오늘의 불행한 위헌적 위헌결정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이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합리적 제도가 합리적 결론을 도출시켜주리라는 낙관적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제도적으로만 해결되어야 한다는 안일한 믿음 때문에, 정작 중요한 과정적 정치행위를 포기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손을 놓고 멍하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황당한 인간들에 의한 조작적 게임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의 사태에 대해 중대한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대부분 법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반성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확신을 변호하고 주장하고 변명하는 데만 익숙하다. 그것이 바로 법이라는 권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의 사태에 대하여 자신의 선함을 변호하기보다는 본질적인 반성의 계기를 획득하기를 희망한다.

우리 국민이 노무현이라는 인격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여태까지의 정의롭지 못한 모든 관행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가 새로운 길을 걸어가 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돈을 더 많이 벌어주기를 바랐다면 굳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갈망의 골이 깊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정직하게 형량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국민적 갈망을, 그리고 역사적 사명을 노무현은 결코 배반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어떠한 대통령보다도, 노무현은 권좌에 앉았다 해서 권좌에 앉기 전의 신념과 삶의 태도를 저버리는 인간이 되지는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그의 도덕적 신념의 일관성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적 미숙함과 서투름에 있으며, 그 서투름이 국체의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는 불안감이 국민의 칠정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자! 2002년 12월 19일 아침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투표장에 가서 노무현이라는 이름 위에 빨간 도장을 찍으면서도 그러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모든 예측이 역전되었다.

이 역전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행운이 아니라, 단군이래 우리 민족사의 최대의 역전이다. 나의 표현은 결코 과장법이 아니다. 국민 과반수의 순결한 합의에 의해, 완벽하게 권력의 비호로부터 단절된 한 인간, 기존세력에 철저히 억압받던 한 개인이 최고의 권좌의 위를 획득한 사건은 유사이래 최초의 사건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본사상에 의한 꾸준한 민권의 확대과정의 결과이며, 가깝게는 인내천의 보편주의적 인간관을 확립하고 반상의 차별과 적서의 구별을 폐지하고 다시 개벽의 대동세계를 꿈꾸었던 동학혁명의 좌절된 이상이 일세기 동안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롭게 분출된 한민족 혼의 정화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의 축복은 불란서혁명 덕분도 아니요 미국독립혁명 덕분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민족사에 내재하는 구조적 변화의 결정적 계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계기를 구조적으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21세기에까지 와서 불란서역사가 19세기에 되풀이했던 공화제와 왕정복고의 어지러운 번복의 시련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헌재 재판관을 가련하게 보는 까닭

2002년 12월 19일 밤, 나는 신문기자로서 취재의 기나긴 여로를 마친 후 피곤한 육신을 잠자리에 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여명은 이 자리부터 시작이다라고. 나는 이 희망을 지금도 포기할 수가 없다. 우리 민족사의 최대의 과제상황은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개인을 통하여 표출된 민중의 갈망, 그 혁명의 계기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내면화시키는가에 있다. 이것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오와는 무관한 우리 역사 자내(自內)의 사명이요 과제상황이다.

나 도올이라는 사상가는 노무현도, 박근혜도, 한나라당도, 조·중·동도 모두 품안에 안을 수 있다. 사상가에게 우리 민족 동포 그 어느 누구도 대적적 타자로서 이립(離立)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혹은 헌재 재판관을 가련하게 바라보는 까닭은 바로 우리 역사가 갈망하고 있는 혁명적 변화, 그 민중의 함성에 역행하는 짓만을 역사의 정도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변소간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구린내를 맡게 할 방법이 묘연한 것이다.

도대체 전후에 모든 역사가 거쳐야만 했던 과거사청산이 왜 나쁜가? 지금 와서 국보법 폐지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어째서 45분 거리의 행정수도이전이 천도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일이며 망국의 길인가? 일산이나 분당 하나 더 짓는 것보다도 더 가벼운 일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왜 그렇게 생각의 여유들이 없는가?

왜 노무현이 정책으로 내걸었다고 그렇게도 숨넘어갈 듯이 반대만 일삼아야 할까?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오로지 우리 역사의 혁명적 이행의 효율성에 관한 견해차이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조건 역방향으로 가려 하고 무조건 봉쇄하려고 하고 무조건 증오하기만 한다면 과연 대화나 타협이나 화해의 가능성이 있을까?

우리 국민이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을 수용하지 않아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그리고 노무현이 이러한 결정에 대해 굴복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우리 민족사의 혁명적 과제상황을 가장 구조적으로 내면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신행정수도였기 때문이다. 사실 행정수도이전에 비한다면 국보법 폐지는 코스메틱한 것이요, 과거사청산은 센티멘탈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가끔 ‘쨉’으로나 써먹을 작전들이지 전면공세의 주요전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사청산? 좋다! 아무개 아버지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한 적이 없다고 아무개는 일제의 죄악으로부터 당당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과연 이 땅의 어느 누구가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독립운동한 사람은 훌륭하지만 독립운동 안 했다고 나쁜 놈일까? 괜히 신기남만 쌩피본 것 아닌가?

국보법 폐지? 아! 좋지! 그런데 형법 보완해야 할 거라면 그까짓 것 그렇게 들먹여서 공연스레 시끌저끌한 빌미만 주고 말 일이 아닐까? 이렇게 따지다 보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명백한 죄악의 몇몇 케이스를 적절한 절기에 상징적으로 바로잡아 바른 사회적 가치와 기강을 세우면 될 것을, 정권의 존재이유나 되는 것처럼 그런 것들에 전적으로 매달린다면 그것은 작전적으로 좀 우매하다 해야 하지 않을까?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청산, 기타 개혁법안들은 행정수도이전에 비한다면 우리역사의 구조적인 변화를 틀 지우기에는 미흡한 것들이다. 행정수도이전은 얼핏 보기에는 비정치적인 사건같이 보이지만 우리 사회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본말을 이야기한다면, 본(本)을 봉쇄당하고 과연 말(末)의 개선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행정수도이전의 공약도 못 지키고 나머지 개혁법안 흐지부지 흘러가고 이제 민생에 전념한다고 대기업 꽁무니만 좇아 다닌다면 과연 참여정부·개혁정부의 존재의의가 무엇일까?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개인을 통하여 우리 역사가 성취하려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일까?

노나라의 실세며 삼환의 패자였던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政者, 正也.) 여기 정(正)이란 타동사이다. 그것은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집을 때려부수는 작업이다. 노무현의 정(正)은 바로 부정들의 한가운데 포위되어 있다는 원초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지을 낭만이 허락되어 있질 않은 것이다.

행정수도이전에 비하면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 청산은 ‘쨉’이다

국민의 과반수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민족사적 사건은 그에게 혁명적인 권력을 부여한 사건이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단군이래 어느 치자보다도 순결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한 권력자이다. 탄핵을 받으면서까지도 또 다시 순결한 국민의 지지를 통해 그 위를 공고히 한 권력자이다. 조선역사를 통틀어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순결한 대중의 지지기반을 획득한 치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노무현은 철저히 거부했다. 대통령이 지시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만이 과거의 모든 위압적인 권력구조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후 50일 내가 그를 최초로 인터뷰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소신을 피력했다.

나는 그를 “무위(無爲)의 대인”이라 표현했다. 과연 그의 무위는 소기의 성공을 거두고 있을까? 그의 무위는 그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변명하는 레토릭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무위적 도덕성이 헌재위헌 결정까지를 유도했다면 과연 우리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값비싼 민주의 교훈을 축적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일례를 들어보자! 노무현은 대통령취임 후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국정원 보고를 받지 않겠습니다.” 국민들은 이 한마디의 함의를 잘 모른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출근하면 매일매일 먼저 국정원의 직접보고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거기서 어떠한 얘기가 오가는지 대통령 이외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밀실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무현은 양지바르고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어두운 밀실정치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정보원들의 횡포를 통한 과거의 모든 비리로부터 우리사회를 해방시키겠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사회비리만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모든 국내·국외의 정보를 관장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생각해보라! 대통령이 직접 보고를 받지 않는다면, 어느 정보원이 목숨 걸고까지 세계를 주름잡으며 위험한 정보수집행위를 감행하겠는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차장급의 정보수집을 위해 과연 국정원이 소정의 임무를 수행할까?

대통령이 과연 국정원 보고를 받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숭고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제스츄어는 우리나라 정보체계 전체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표면적이며 유치한 정보들만 유통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가 유치해지고 대통령 자신의 정보체계가 단조로와지는 것이다. 민주화의 대가란 과연 이런 것일까? 양지가 있으면 그늘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한 국가사회의 기능방식은 너무도 컴플렉스한 것이다.

내가 지금 노무현의 통치스타일에 관하여 좀 노골적인 정보들을 여기 다 상술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내가 국민들에게 확언하는 것은 노무현은 우리 역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매우 단순한 도덕적 신념의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그 도덕적 신념이란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정치체제에서보다도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향유가 아이러니칼하게도 언론권력의 대중조작을 조장시키고, 불필요한 집회·시위를 가중시키며, 법권력의 남용과 타락, 행정관료들의 무능과 무사안일주의, 국가정보체계의 피상화, 대외정책의 불민함, 경제의 비활성화 등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면 우리 국민은 민주라는 레바이아탄의 근원적 파라독스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노무현의 무능과 도덕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문제라기보다는 진실한 모든 인간의 파라독스일 수도 있다. 인간세의 무명(無明)의 비극일 뿐이다. 노무현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에게 단추를 다시 끼라고 명령하기에는 이미 잘못 낀 단추가 그의 확고한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한비의 지혜를 권하고 싶다

진시황이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어했던 희대의 사상가 한비(韓非)는 치자의 무위에는 반드시 두 개의 칼자루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이병(二柄)이라 불렀다. 이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상(賞)과 벌(罰)이다. 상과 벌이라는 칼자루만 확실하게 쥐고 있다 할지라도 나머지는 무위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비의 지혜를 권고하고 싶다. 이제 통치 2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낭비나 시행착오, 초보적 학습과정을 거쳐서는 아니된다. 자신의 도덕성에 엄격한 만큼 국민에게도 치열한 규율을 요구해야 한다. 노무현은 상을 줄 줄도 모르고 벌을 줄 줄도 모른다. 이것이 국민 대다수의 불만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것은 도덕적 결백성의 지속적인 입증이 아니라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확실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해달라는 것이다. 도덕적 무위 속에 표류하고 있는 국정에 보다 프로펫셔날한 기준을 설정해달라는 것이다. 개혁의 궁극목표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 목표를 위해 내가 일전에 말한 소언(少言), 호문(好問), 치대(治大)의 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 사람과 한 시간 대면한다면 그대는 10분 이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그 10분도 오직 상대방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추임새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50분 이상을 자기 얘기로 메꾸고 있다.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자기 상념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少言) 많은 적재적소의 긴요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好問) 국가대강의 기틀을 잡아가는(治大) 모든 기회를 빠짐없이 포착해야 한다. 무위의 진정한 기틀은 통치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집을 파기시키고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자기존재의 모습에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제 더 이상 노무현이라는 실존적 개인에 대한 호오를 얘기해서는 아니된다.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개체와 더불어 우리 역사가 무엇을 성취해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의 도덕적 실천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보다 합리화되고 혼란 속에서도 자율적 규제능력을 획득해가고 있다는 총체적 비전의 가치를 형량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 국민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가치를 자율과 규율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어려운 작업들을 감행해야 한다. 헌재의 재판관처럼 힘이 있다고, 힘을 마구 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서, 총체적 국가비전에 대한 저울질이 없이 그 힘을 사용하는 방자한 행동을 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이제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이란 자기 자유를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능력이다.

지난 목요일 헌재결정이 난 후 홀로 낙한재 골방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다시는 이 사회의 진보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겠노라고, 절망의 절필을 선언ㅤㅋㅔㅆ노라고, 노무현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겠노라고, 열린우리당 동포들의 치졸한 아마츄어리즘을 더 이상 용인치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어쩌다가 또 다시 붓을 들어 이렇게 만연의 산필을 흩뜨리고 있는 나 도올 자신의 모습을 애처롭게 쳐다본다.

운필의 노동으로 어깨근이 파열되어 피멍이 맺히도록 나의 육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이 깊은 새벽 밤에, 나의 절규가 나 홀로만의 것이 아니라 수백만 동포들이 같이 호흡하는 숨결이라는 안위감에 그저 살아있다는 감동만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2004년 10월 27일
새벽 4시45분 탈고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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