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팔루자에선 무슨일이 있었나 – 1

이라크의 광주 – 팔루자 학살 증언. 349명의 팔루자 난민에 의한 팔루자 학살증언 – 12인 팔루자 시민 육성 보고서


Ⅰ. 조사의 개요
조사기간 : 4월 5일부터 – 4월 19일
증언채록방법 : 3회 방문 및 인터뷰
증언채록일 : 4월 13일, 15일 – 17일, 19일
조사지역 : 바그다드, 팔루자 인근 사막 피난민 거처 7곳
조사대상 : 팔루자 난민 349명

조사자 : 이라크인 2, 한국인 1
1. 알리-알-두레미(25세, 남)
2. 세르민(53세, 여, 전 대학교수 아랍어문학전공)
3. 윤정은(31세, 여, 이라크평화네트워크)

증언자들

1. 누리예 시미크, 여, 52세, 하이-바잘 지역 거주
2. 로다아 아우바이드, 여, 56세, 하이-줄란 거주
3. 무함메드 자밀, 남, 26세, 하이-아스카리 거주
4. 사브리에 오베이드, 여, 75세, 현재 팔루자 인근 알-사그리위에 거주
5. 로다아-아우바이드, 여, 56세, 하이-줄란 거주
6. 무하메드, 남, 44세, 성직자, 하이-바잘 거주, 현재 바그다드 하이-알-두바트 대피
7. 하미드 제삼, 여, 54세, 바그다드 내 하이-알-두바트 대피
8. 세미르 누리, 여, 25세
9. 아흐메드 노와프, 남, 25세, 교사, 하일-바트 거주
10. 바툴-후세인, 여, 10세, 하이-바잘 거주
11. 하난-마지드, 9세, 하이-아스카리 거주
12. 나쉬미야-압바스, 80세, 시각장애인

– 이상의 12명의 증언자 외 자말 하심(56세) 등을 포함한 10여명이 인터뷰 증언이 더 있었다. 그 증 언자들의 증언들을 다 싣지 못했음을 밝히고, 이것은 비슷한 경로를 통해 피난을 나와 증언의 내용이 중 복되거나 동일한 내용이라는 판단 하에 참고사항, 혹은 확인된 사항으로서 설명으로 증언채록 목록에서 설명으로 대신했다.

Ⅱ. 조사보고서 구성
1. 팔루자 학살 사건의 시작과 배경
2. 팔루자 민간인 학살과 미군의 공격
3. 팔루자 난민현황

Ⅲ. 팔루자 개요 및 학살전개과정

[#M_ more.. | less.. | 팔루자 개요

인구 : 약 20만명 (현재 3분의 1이상이 피난 – 한겨레 21일자 보도)
위치 : 바그다드 서쪽 40킬로 지점 – 요르단에서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길목
종교 : 이슬람수니파 집중주거지역

팔루자 학살전개과정

3월 31일 : 미 경호원 4명 사살 및 시체훼손사건
4월 5일 봉쇄 : 미국의 보복공격 시작 “단호한 결단”
4월 10일 : 이라크 과도통치위 팔루자 학살선언, 5일간 400이상 사망,
1000명이상 부상 공식발표
4월 10일 일시 휴전 : 90분만의 미국 공격으로 전투 재개
4월 17일 : 조 윌딩 증언(가디언) – 880명 시민 사명(50% 여성과 아이)
4월 19일 : 휴전협정 – 저항세력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4월 20일 : 다시 유혈충돌 재개 – 미국의 전면전 경고
4월 21일 : 20만 주민 중 3분의 1이상이 피난길(한겨레 보도)

Ⅳ. 추가 조사계획

1. 현재 팔루자 관련 조사는 윤정은, 강은지 두 사람의 활동가 및 이라크인 조사자들과 함께
추가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사진 및 영상기록 포함)
2. 팔루자 봉쇄가 풀릴 경우 조사단을 구성해 팔루자 학살 진상 조사사업을 진행 예정
3. 이라크 현지의 국제평화활동가 및 이라크 인들과 함께 공동조사단 구성예정

Ⅴ. 난민상황 및 조사요약

3일에 걸쳐, 바그다드와 팔루자 인근 대피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파악한 피난민의 수는 첫날 70명, 둘째날 60명(이 마을에는 최소 500여명 이상의 피난민이 있었다), 셋째날 219명, 총 349명이다. 이 모든 대피처들은 민가에 최소 30명에서 많게는 70명씩 몇 가족씩 함께 있는 경우였다. 또한 바드다드에서 직접 방문하지 않았지만, 모스크 안에 대피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스웹시티의 알-사파 사원이 그곳이다. 140여 가구 700여명으로 현재 알려진 장소 중에는 가장 큰 규모로 난민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경우다.
현재 바그다드 내로 피난한 난민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이 힘들다. 너무 넓은 곳에 대규모로 흩어져 있으며, 그리고 모스크의 도움을 받아 대피하고 있는 경우는 파악이 되지만, 부족이나 가족의 도움으로 몸을 피하고 있는 경우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미군의 봉쇄는 4월 4일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번 나왔던 피난민들의 경우, 봉쇄가 풀려 하루 빨리 팔루자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1. 첫날 방문한 곳은 바그다드 서부 하이-알-두바트(Hay-Al-Dubat).이 두 개인 집에 70명이 머물고 있었다.
– 방문날짜 4월 13일(화)

2. 둘째날 4월 15일(목)에서 17일(토)까지 팔루자 인근 알-사그라위에 지역으로 팔루자에서 5km 떨어진 마을. 이 마을에 최소한 한 가구당 40명, 50명 이상의 난민들이 대피하고 있다. 마을의 규모가 총 20여가구 넘는 걸로 추정되어 최소 500여명 이상이 대피하고 있다. 면접한 가족의 경우 60명이 대피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친인척들이다. 이들은 모스크의 도움이 아니라 바그다드에 거주하고 있는 부족의 도움을 받고 있다.

3. 셋째날 4월 19일은 첫날 방문한 곳에 난민들이 그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하이-알-두바트를 방문했다. 총 5가구를 219명을 직접 방문하여 만났다. 이날 만나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피난민의 경우 대다수가 여자와 어린이였다는 점이다. 현재 태어난 지 42일 되는 아이부터, 여섯달 난 영아들 또한 만났고, 80살이 시각장애인 노인까지 인터뷰를 했다. 연령층은 이렇게 다양했다. 노약자와 아이들, 여성들이 팔루자를 떠나 바그다드에 대피하고 있다.
문제는 바그다드로 들어온 난민의 경우에는 직접 방문과 면담이 가능하지만, 바그다드로 진입하지 못하고 사막에 갇혀있거나 피난 도중 실종, 사망한 수는 현재 파악이 불가능하다. 이 숫자도 꽤 된다. 미군은 펩시콜라 공장에 몇 백명의 피난민들을 가두고, 며칠째 감금하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1. 팔루자 사태 발단 배경

4월 9일은 바그다드 함락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날 미군은 팔루자를 비롯한 바그다드 인근 수니삼각지대의 몇 지역과 이라크 남부 중부 시아파 성지인 카르발라와 나자프 등지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군의 이라크 점령 1년의 결과가 전쟁이었다. 제2전쟁으로 불리는 이 전쟁은 “1년 전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침공 때보다 더 지독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고 이미 이번 공격에서 지휘를 하고 있는 미 해병대 대대장 브레넌 바인 중령이 시인을 했다. 미군의 이라크 점령정책이 1년을 맞아 대실패를 맞았다.

미군은 이번 사태를 맞기 전까지는 이라크 점령정책에서 다음 세 가지를 견지하고 있었다.
1. 수니삼각지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통한 후세인 정권 잔당 축출 및 청산
2. 시아파 포섭 정책
3. 쿠르드 지역 자치권 부여로 이라크 연방제 도입

그러나 3월 8일, 6월 30일에 정권이양을 위한 과도헌법이 통과되면서 미군정은 1년 동안의유지해오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미군정의 태도 변화뿐 아니라 이라크 국민들에게 막강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지도자들 또한 태도 또한 조금 변화한 지점이 있다. 그 동안 미군정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보여왔던 시아파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알-시스타니가 과도헌법에 대해 미군정과 다른 입장을 발표한 것이다. 특히 그는 연방제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또, 시아파 내에서 알-시스타니와는 달리 미군정에 대해 줄곧 반대의 목소리를 지켜왔던 모크타다 알-사드르의 경우는 강도높게 이 과도헌법을 비난했다.
미군정은 그 동안 줄곧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알-시스타니의 행보를 주시하면서, 한편 3월 28일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 임시행정처(CPA)가 시아파 종교소식지인 알-하우자에 60일간 정간조치를 내리면서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다.

알-하우자는 매주 목요일 8-12쪽씩, 1만에서 1만 2천부가 발행되는 유가지였다. 이 주간지는 발행되는 그날 즉시 매진될 정도로 호응이 좋은 편이었다. CPA가 이 소식지에 정간조치를 내린 이유는 젊은 시아파 지도자였던 모크타다 알-사드르의 금요 설교를 매번 게재하는 등 미군정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알-사드르는 3월 8일 과도헌법이 통과된 후, 이 과도헌법에 대한 비판 및 미군정의 점령정책을 비난의 강도를 높여와 미군정으로 봐서는 가장 기피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미군정은 알-하우자에 대한 정간조치에 그치지 않고, 곧이어 알-사드르에 대한 체포영장까지 발부하면서 시아파와의 관계를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체포영장에 대한 명분은 알-사드르가 지난해 4월 발생했던 알-시스타니 측근인 압둘 마지드 알-호에이 피살사건과 같은 해 8월에 일어났던 알-하킴 폭사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었다. 피살된 알-호에이와 알-하킴은 시아파 알-시스타니의 측근들로서 시스타니와 마찬가지로 미-영 연합군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이 때문에 미군정은 호이 피살사건이 시아파 내에서 알-시스타니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알-사드르가 꾸민 암살이 아니냐는 혐의를 가지고 수사를 해왔다.

알-하우자 정간 조치와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4월 3일, 미군정은 시아파 종교지도자인 모크타다 알-사드르를 범법자로 규정하고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에 대해 시아파 신자들은 바그다드를 포함해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빌라에서 알-하우자 정간조치와 알-사드르 체포영장에 반대하는 농성을 연일 했다. 이런 와중에 사건이 커지게 된 것은, 4월 4일, 나자프 모스크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연합군이 발포해 21명 사망, 200여명의 사람이 다쳤다. 이날을 기점으로 농성과 시위를 벌이던 시위양상이 무장항쟁으로 바뀌었으며, 이를 진압하려는 미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무장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에 맞서 이라크 내부 저항도 시아-수니가 연합하여 미군에 대항하고 있다.

또, 같은 때인 3월 31일, 미국 본토를 당혹스럽게 하는 사건이 수니삼각지대 내 팔루자에서 발생했다. 팔루자에서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아 미국 민간경호업체 직원 4명이 사망, 이 시체 2구를 도살된 양처럼 다리 위에 매달아 놓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충격적인 사건의 발생은 1년 동안 미군정이 진행해온 수니삼각지대에 대한 대대적 소탕작전과 맞물려 있다.
바그다드, 라마디, 티그리트를 잇는 수니삼각지역은 전쟁 이후, 미군의 저항세력 소탕작전이라는 명분으로 1년동안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다. 또, 연일 저항세력들에 의한 폭탄테러 또한 끊이지 않았다. 미군 측 입장에서 보면 수니삼각지대는 후세인 정권 하에 활동했던 핵심세력들이 잔존하고 있는 지역이고, 모든 무장봉기의 진앙지였다. 따라서 반미감정의 원산지로 파악하는 이 지역 저항세력을 뿌리째 뽑겠다는 것이 점령정책의 주요골자였다.
이로 인해 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다. 이 피해들은 바그다드를 비롯하여 수니삼각지대에서 진행된 저항세력 소탕 작전 진행 과정 중, 미군이 민가에 난입하여 총기 수사, 무차별 체포, 구금, 발포, 살해 등에 의한 피해이다.
Human rights in Iraq에 의하면 CPA로 접수된 민간인 피해 규모는 지난 1년 동안 1천여 건을 넘었으며, 민간인의 사망 피해로 현재까지 보상을 받은 경우는 25건에 해당한다. 보상금은 대략 2000달러에서 3000달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해 사례는 지난 3월 15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 1년이 되는 때에 3일 동안 열렸던 “미 점령 하에 고통받는 피해자와 함께 하는 연대의 날” 행사에 내걸린 구호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Human rights in Iraq’와 ’International Occupation Watch’와 ‘미군에 의한 희생당한 피해자 가족모임’이 함께 열었다.
 
Stop arbitrary arrest! 
Stop collective punishment! 
Release children from prison now! 
Stop random shooting! 
Stop violent against the citizens 

한 피해자 가족을 직접 인터뷰했을 때, 미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의 전형적인 양상을 볼 수 있다. 미군은 수니삼각지대에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이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가에 난입해 총기소지 등 증거물을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가두었다.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었을리도 만무하다. 지난 2002년 11월에 새벽에 집에 들이닥쳐 아들이 미군에 의해 끌려가, 그 아들을 찾으러 이라크 남부 바스라부터 감옥을 헤매고 다닌다는 한 어머니의 눈물을 통해 바그다드와 수니삼각지대에서 미군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감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지난 3월 31일에 있었던 미국인들 사체 훼손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그 당시 팔루자의 민심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미군정의 점령이 시작된 지 1여년 동안 이라크는 극심한 실업난과 사회혼란이 계속됐다.
미군정은 실업난과 사회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과 민심 안정보다는, 특히 수니삼각지대에 잔존하는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데에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또한 민간인 피해 양상도 심각했을 뿐더러 기간 또한 너무 길었다. 당장 전쟁으로 일자리를 잃어버린 수니삼각지대 주민들에게, 미군정은 1년 동안 저항세력소탕작전이라는 명분으로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택 수사를 하면서 민심을 악화시켰던 것이다.
그 무렵 팔루자에서는 심지어 가장들이 아이들에게 줄 우유 한병, 펩시콜라 한병 살 돈이 없다고 얘기되어질 정도였다.
미군정 점령정책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과 저항감의 폭발로 팔루자에서 미 경호요원 4명의 시체 훼손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 민간경호업체 안전담당 직원들은 말이 민간인이었지, 그들은 미군에 협조하여 이라크에 대한 정보수집을 하던 임무였다. 심지어 현지에서는 CIA요원이라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으니, 미군정의 저항세력 소탕작전과 무관한 민간인이 아니었고, 그 까닭에 팔루자 주민들의 화가 그들에게 미친 것이다.

또 한편, 그 무렵인 4월 초 시아파 신자들은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와 카르빌라에서 알-하우자 정간조치가 이뤄진 다음날부터 연일 시위를 해왔다. 또, 알-사드르 체포영장 발부되면서 그동안 쿠파에서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모크타다 알-사드르가 나자프 이맘 알리 사원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를 체포하기 위한 미군의 나자프 공격설로 나자프에서는 긴장감이 높아갔다.
그러다가 이 긴장이 팽팽한 즈음에 불을 붙인 건 4월 4일, 나자프 모스크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연합군이 발포해 21명 사망, 200여명의 사람이 다친 것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농성과 시위를 벌이던 시위양상이 무장항쟁으로 바뀌자, 연합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시아파 성지인 나자프를 비롯한 지역에서 공격을 감행했고, 사체훼손 사건이 일어났던 팔루자에 대해선 보복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지난 4일부터 미군이 수니지역과 시아 성지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이후로부터 현재까지는 이라크는 시아-수니 연합전선을 구축해 미군정에 전면적으로 대항하고 있다.

현재 미군정은 바그다드 점령 1년을 맞아, 이라크 전체와 맞서고 있다. 지난 13일 미 부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라크는 내전 상황도 아니고 대중적인 봉기도 아니다”며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라크의 폭력은 무자비한 쪽들의 권력투쟁이며, 후세인 잔당들과 이슬람 무장단체 테러리스트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이 사태를 축소해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문제를 잘못 진단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1년 전 후세인 동상을 끌어내리고 미군의 점령에 대해 손을 흔들던 이라크 국민은 이젠 한 명도 없다. 1년 전 미군은 바그다드는 쉽게 점령을 했을지 몰라도, 1년 동안 이라크 점령정책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슬람 종교 문화에 대한 무지와 이해부족, 이라크 분리분열정책으로만 일관해온 점령정책의 부재, 그리고 오만한 제국주의.이것이 전 이라크 민중봉기를 불러왔다. 미국의 기대와는 달리 소수의 무장단체가 조장하고 있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이라크 국민들은 현재 “이라크에서 미군 철수”를 외치고 있다.

그리고 또, 미군정은 이번에 팔루자에서 민간인 대학살을 자행했다.이것은 4월 9일, 시민들뿐 아니라 압델 카림 마후드 알-마하마다위를 비롯한 과도통치위원들은 미군의 팔루자 공격을 학살이라고 규정하고 미국이 팔루자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과도통치위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날 과도통치위에서는 팔루자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5일 동안 최소한 400명 이상이 죽고, 1000명 이상이 다쳤다고 공식발표 했다.과도통치위까지 그렇게 나서니 미군은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10일 일시적인 휴전을 발표했으나, 90분 뒤에 팔루자에 대해 또 공격을 가했고, 12일 밤을 기점으로 해,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한 팔루자 진입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현재도 팔루자는 미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이다.

2. 팔루자 민간인 학살과 미군의 공격

팔루자는 크게 다섯 지역으로 구분된다.
1.하이-바잘(Hay-Vazzal)
2.하이-알-아스카리(Hay-Al-Askari)
3.하이-알-슈하다(Hay-Al-Ahuhada)
4.하이-알-줄란(Hay-Al-Jullan)
5.하이-알-무히트(Hay-Al-Muheet)

미군은 팔루자 내의 다섯 지역 모두를 완전 봉쇄했다. 바그다드-팔루자간 도로를 타고 팔루자 진입하는 순간, 왼쪽으로는 거대 산업단지지대가 위치하고 있다. 이 산업단지를 지나가면 하이-바잘이라는 주거지역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는 하이-아스카리이다. 하이-바잘과 하이-아스카리가 팔루자 진입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와 미군-무자헤딘간에 있었던 교전의 피해가 좀더 많은 편이다.
미군은 한번도 팔루자내로 진입로를 통해 체크포인트를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정도로 교전이 치열했고, 무자헤딘의 저항 또한 완강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 진입이 불가능했던 미군은 전투기(F-15, F-16)와 아파치헬기 등을 동원하여 공중에서 폭탄과 미사일로 대규모 공격을 연일 감행했다. 이로 인해 팔루자 시내 전체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이것이 민간인의 피해가 속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4월 5일(월) 아침.

증언

“팔루자로 진입하려는 미군의 탱크와 장갑차와 많은 병사들이 하이-바잘 지역 전에 있는 산업지역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미군은 팔루자로 진입하기 위해 탱크를 몰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공격에 맞서 진입로를 지키고 있던 무자헤딘들이 총을 쏘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에 벌어졌던 이 교전은 엄청 났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무장세력 무자헤딘은 온 힘을 다해 막아냈다. 미군은 몇 번 더 진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오후부터는 미군들이 집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때, 민가, 건물, 거리가 온통 파괴됐다. 그리고 이날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교전은 밤까지 계속 됐다. 교전과 동시에 야간에는 아파치 헬기가 로케트를 쏘아 민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성, 누리예 시미크, 52세, 하이-바잘 지역 거주, 현재 팔루자 인근 알-사글위에 지역에 대피)

증언 채록일 : 4월 15일(목). 이 증언은 공격개시 첫날인 4월 5일부터 민간인의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미군은 공격 개시 첫날부터 민가와 무자헤딘 은신처를 구분하지 않고 공격했다. 그야말로 대규모 공세였다. 이 야간에 있었던 아파치 헬기 미사일 공격이 대규모적으로 이뤄졌으며 팔루자 내 큰 빌딩과 민가와 거리들이 많이 부서졌다.

“공습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그러나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병원에 가는 다리가 봉쇄됐다.”
(여성, 로다아 아우바이드, 56세, 하이-줄란 거주)

증언 채록일 : 4월 15일(목).

팔루자 시내에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지금 그가 증언하는 다리는 국립 팔루자 병원으로 통하는 다리를 말한다. 미군은 이 두 개 다리를 모두 봉쇄했다. 환자후송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자, 사람들은 다친 사람들을 모스크나 오래된 건물 등으로 옮겨 치료를 했다. 팔루자에는 큰 병원이 두 개다.

1. 국립 팔루자 병원(이번 팔루자 민간인 학살 사건에서 미군 측은 민간인 사망자수를 계속 속여왔다. 심지어 7일 압델-아지즈 알-사마라이 모스크 폭격으로 그 자리에서 40명 이상이 죽었는데, “사원의 벽이 조금 파괴됐고, 무장세력 1명이 죽었고, 민간인 피해는 단 한명도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병원의 의사가 이날 사망한 민간인 수를 공개하면서 민간인의 피해가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2. 탈리브 병원(개인 병원)은 미군이 공중에서 폭격해 파괴됐다. 이 병원은 운영되지 못했다. 또한 많은 증언들은 미군이 엠블런스를 공격하여 환자 수송과 치료를 막았다고 한다. 알-사드르의 시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구급차 드라이버를 저격수가 조준 사격해 임산부를 후송하던 운전기사가 크게 다친 것을 직접 확인했다.

■ 기타

-연합군 미군측 대변인 마크 커미트 준장은 “미 해병대 1천3백여 명이 투입됐으며 5일 밤 공격으로 적어도 이라크인 한 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작전명은 ‘단호한 결의(Vigilant Resolve)로 명명됐고, 동원된 무기는 AC-130 중무장 항공기 105mm 전차포 등을 이용한 공중폭격. 이것은 일부 증언에서 첫날(5일)에는 전투기로만 공격했고, 이튿날(6일)부터는 아파치 헬기가 함께 동원됐다는 것과 일치한다.
AP 연합에 따르면 교전에서는 미군 전차와 장갑차로 팔루자를 완전 포위했고, 이 공격을 앞두고 5일(월) 오후 7시부터 6일 오전 6시 사이에 통행금지가 내려졌다. 5일부터 미군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바그다드-요르단 고속도로를 폐쇄, 통제됐다. CNN 보도에서는 5일 오전 교전으로 미 해병 한 명 사망, 이라크인 적어도 7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날 미군은 팔루자 공습 이외에도 바그다드 북부 알-사드르시티에서 지상군과 아파치 헬기를 동원해 알-사드르 사무실을 폭격. 이라크인 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됐다.
알-사드르시티가 바그다드 중심부와 20, 30여분 거리에 위치한 가까운 지역이므로, 바그다드 중심부까지 이날밤 두 번의 큰 폭발음과 연이은 폭발음 및 총소리가 들렸다.
5일 밤, 미군은 바그다드 외곽 지역은 팔루자와 알-사드르 지역과 알-아드하미야 지역 세곳을 거의 동시에 공격했고, 밤새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또한 5일, 미국 국방부는 USA투데이를 인터넷판을 이용해, “향후 수주 내에 미 본토로 귀환시킬 예정이던 2만 4천여 명의 미군 귀환 방침을 무기한 연기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당초 미 육군 보병 제4사단과 101 공중강습사단, 1기갑사단, 82공중강습사단 등이 미군 교체 작전의 일환으로 5월말까지 이라크를 철수할 예정이었다.

4월 6일(화)

■ 증언

“미군들은 하이-바잘 지역을 거쳐 팔루자 안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무자헤딘과 계속 교전이 있었다. 미군은 몇 번 후퇴한 후, 다시 진입 시도를 몇 차례 했다. 우리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죽었다. 미군이 모든 시내를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집 뒤에 숨어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집안의 어떤 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미군이 공중에서 공격을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차 뒤에 가서 숨기로 했다. 그러다가 우리집이 팔루자 진입로인 하이-바잘 지역이다 보니 더 위험한 것 같아서 팔루자 중심부 쪽으로 이동해서 오빠의 집으로 대피했다. 남편과 아들은 집에 남아있었다. 그들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여성, 누리예 시미크, 52세, 하이-바잘 지역 거주)

증언 채록일 : 4월 15일(목). 그녀는 이 증언을 하며 울었다.

“미군은 전투기로 알-줄란 지역을 폭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길가에 누워있는 걸 봤다. 다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저격수들이 모스크 위에 올라서 무자헤딘을 향해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화요일에 잠깐 체크포인트를 넘어 산업단지지역(진입로를 바로 넘어 왼쪽으로 industry area가 위치하고 있다)까지 진격해왔지만, 다시 무자헤딘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미군 저격수가 나의 사촌을 죽였다. 형제 중 1명도 다쳤다. 또, 로케트 공격으로 가옥이 부서지면서 나의 사촌 1명은 크게 다쳤다”(남성, 26세, 무함메드 자밀, 하이-아스카리 거주)

증언 채록일 : 4월 19일(월)

■ 기타

6일에는 교전이 더욱 치열해졌다. 이라크 전역으로 전쟁 확산. 수니삼각 지역 외에도 시아파 성지 등에서도 교전이 발생했다. 바그다드 인근인 팔루자와 알-사드르시티에 있었던 교전 외에도 이라크 남부와 중부 시아파 성지지역에서도 잇다른 무장봉기가 일어나 연합군과의 교전으로 사상자의 수가 급증했다.
-수니트라이앵글 지역인 라마디(바그다드 서쪽으로 90Km)에서 교전으로 미군 12명 사망. 이밖에 연합군 2명,
-남부 나시리야에서 알-마흐디군(모크타다 알-사드르가 이끄는 민병대)이 이탈리아군과 교전을 벌여 민간이 2명이 죽었고, 이탈리아 군 차량 4대도 불에 타 전소됐고,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군 11명 부상했다.(알-자지라 방송) 또, 이탈리아 통신사에 의하면 이라크인 15명 사망, 8명 보도(쿠트콤)
-아마라 지역에서는 영국군과 알-사드르 민병대와의 전투에서 15명의 이라크인 사망, 8명 부상.

4월 7일(수)

■ 증언

“나의 두 남동생은 진입로 바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인 하이-아스카리에 살고있었다. 이 지역은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지난 4월 5일 오후부터 전화로 연락을 해오던 한 남동생과 이제는 전화가 안된다. 연락이 끊기기 바로 직전 남동생이 전화를 걸어 말했다. 지금 모든 건물 옥상과 지붕 위에 미군 저격수들이 있다. 그들은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쏘고 있다. 그래서 문을 열 수 없다. 너무 무섭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전화통화였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들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다른 남동생은 저격수에 의해 쏜 총에 죽었다. 이 동생이 죽었다는 건, 사촌의 가족들이 팔루자를 떠나 이곳 사그리에로 도착한 다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 남편의 사촌 중 한 사람도 폭격으로 건물 잔해에 깔려 숨졌다.”(여성, 사브리에 오베이드, 75세, 현재 팔루자 인근 알-사그리위에 거주)

증언 채록일 : 4월 15일.

이라크는 부족사회의 전통이 남아있다. 집안의 대소사를 연장자들이 의논, 결정, 해결한다. 이 여성의 남편의 경우 부족의 가장 연장자이므로, 현재 그녀의 집에 팔루자에서 대피한 그의 친척들이 60명이 있다. 이 마을에 한 가구당 최소한 40, 50명의 팔루자 피난민들이 몸을 피하고 있다.

“탱크, 헬리콥터, 전투기.. 이 모든 것이 팔루자를 공격했다. 모든 사람들이 집안에 숨어있었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스크도 공격했다. 다음날 무자헤딘이 두 대의 헬기를 격추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8일(목)에 하이-줄란을 떠나 알- 니에니아 사막을 지나 바그다드로 왔다.”(여성, 로다아-아우바이드, 56세, 하이-줄란 거주)

증언 채록일 : 4월 15일.

“나는 길거리에서 개가 시체를 뜯어먹는 걸 봤다. 미군은 심지어 환자를 후송하는 엠블런스도 공격했다. 지금도 거리에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다. 미군들은 무자헤딘이 모스크에 숨아있다고 하면서 모스크를 파괴했다. 모스크 이름은 알-마드헤리이다.”
(남성, 무하메드, 44세, 성직자, 하이-바잘 거주, 현재 바그다드 하이-알-두바트 대피)

증언 채록일 : 4월 19일.

그는 성직자였다. 방이 하나인 집에 현재 40명이 대피하고 있어서 증언채록 마지막 질문으로 혹시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모스크에서 음식과 물을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오직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집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신의 자비가 필요하다. 미군이 팔루자에서 나가고, 봉쇄가 풀려야 한다. 우리는 정의와 평화를 원한다. 우리는 어떤 외국 군대도 필요치 않다. 팔루자에서 학살이 진행됐다. 이것이 외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알려져 도움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 기타

– 이날 미군은 코브라 공격용 헬리콥터와 F-16 전투기를 동원해 모스크에 미사일 공격을 퍼붓고 5백파운드의 폭탄을 쏟아 부었다. 이날 공격을 받은 사원은 압델-아지즈 알-사마라이 모스크이다. 폭격으로 최소한 민간인 40여명이 사망했다. 이날 미국 중부군 사령부는 이 폭격과 관련한 성명을 발표하고 “사원 주위의 벽이 파괴되긴 했지만, 반미 무장세력 1명이 사망하기만 했으며, 민가인 피해가 발생했다는 보고는 없다”고 부인했다. 또, 미군은 “무장세력은 사원을 공격 진지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호해 할 종교시설로서 지위를 잃었다. 앞으로도 사원을 계속 공격할 것이다”로 밝혔다. 그러나 이 성명은 곧 팔루자 병원 관계자가 직접 나서서 병원에서 확인, 집계한 사망자수를 밝히면서 거짓말로 밝혀졌다. 팔루자 병원 관계자는 “미군이 팔루자를 공격한 후, 지금까지 최소한 280여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4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주장했다.
며칠 후, 병원에서 집계되지 않았던 사망자수까지 밝혀지면서 사망자 수는 600명이상으로 밝혀졌고, 부상사수는 1200여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4월 8일(목)

■ 증언

도망쳐 나오는 과정에서 두 아이를 잃었다. 미군은 우리에게 대피하라고 해놓고 사막마저 봉쇄했다. 사막에 꼬박 하루 갇혀있었다. 그러다가 사막에서 물을 마시지 못해 데리고 나온 우리 아이 두 명이 죽었다. 한 아이가 여섯 살이었고, 한 아이가 두 살이다. 우리뿐 아니라 도망쳐 나오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한 가족이 차안에 타고 있었는데, 미군이 차를 세워 총으로 가족을 몰살시키는 것을 보았다. 네 명이었다. 이건 학살이다. 모스크도 파괴됐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는 과도통치위(Governing council)를 반대한다. 그들은 우리를 죽이는 미군을 반대하지 않는다.
(여성, 하미드 제삼 54세, 바그다드 내 하이-알-두바트 대피)

증언 채록일 : 4월 13일(화).

연일 미군의 공습이 계속되자, 이날부터 팔루자를 떠나는 피난행렬이 시작됐다. 대부분이 알-니에니야(Al-Nieniyah) 사막을 통해 바그다드로 도착했다. 8일에 미군은 팔루자 주민에게 “8시간 내로 팔루자를 떠나지 않으면 저항세력 무자헤딘으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미군이 터준 길이 팔루자 서쪽 도로였으며, 이 길을 통해 이날 빠져나가려는 팔루자 주민들이 너무 많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도착한 지점은 사막이었고, 이 사막마저 미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여자와 노인, 어린이들이었다. 지금 바그다드에 대피하고 있는 피난민들 또한 여자와 어린이들이 90%이상을 차지한다.
3일에 걸쳐, 바그다드와 팔루자 인근 대피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파악한 피난민의 수는 첫날 70명, 둘째날 60명(이 마을에는 최소 500여명 이상의 피난민이 있었다), 셋째날 219명, 총 349명이다. 이들은 둘째날 증언채록한 팔루자 인근 마을에 대피하고 있는 6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막을 통과하여 바그다드로 왔다. 바그다드로 온 사람들은 100% 이 사막을 통과했다는 얘기이다.
미군이 바그다드 인접 지역에서 봉쇄해, 피난민들은 최소 하루에서 이틀동안 사막에 갇혀있었다. 뜨거운 태양과 사막 모래로 인해 한결같이 이 피난길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 사막을 지나 바그다드 경계에 인접했을 때, 이 길마저 미군이 봉쇄해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또다시 발생하기도 했다. 증언에서 볼 수 있듯이 사막에서는 어른보다 유아들의 희생들이 먼저 있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우는 건 지금 매우 아프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 여섯 달 된다. 사막 모래가 눈에 들어가 눈이 상한 것 같다. 그리고 태양이 너무 강렬해 아이의 어깨가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피난 도중에 너무 많은 사람들에 밀려 아이가 팔을 다쳤다. 물이 없어 우리들 모두 너무 힘들었다. 이틀을 사막에서 보냈다. 이슬람 구호차가 와서 미네랄 워터와 쥬스, 펩시콜라 등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아마 이것이 없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둘째 날 특히 이 아이가 많이 아팠다.” (여성, 세미르 누리, 25세)

증언 채록일 : 4월 19일(월).

이들은 사막에서 이틀을 보냈다. 피난민들이 수십킬로미터 줄을 서서 무차별 폭격이 있는 팔루자를 빠져나가기 인산인해를 이루어 아비규환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아이를 안고 있던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치여서 채 5kg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는 팔을 다친 것이다. 아이는 증언 채록 내내 몹시 울었다.

“바그다드로 가족과 피난을 왔다가 팔루자에 연로하신 아버지가 혼자 남아있기도 하고, 긴급구호를 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다시 사막을 통해 팔루자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사막에 있는 펩시콜라 공장에 수백 명의 사람이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을 알게 된 건 13일이고, 이 사람들은 삼일 전부터 물도 공급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이 공장을 지나쳐 팔루자로 들어갔다. 아마 공장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남성, 아흐메드 노와프, 25세, 교사, 하일-바트 거주)

증언 채록 : 4월 15일(목).

하일-바트는 바그다드-팔루자 진입로를 통과해서 오른쪽에 위치한 하일-아스카리 다음에 있는 지역으로 팔루자 중심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증언이 남달리 더욱 중요한 것은 아직도 봉쇄되어 있는 팔루자에 들어가 가장 최근에 그곳 현장소식을 전화로 알렸다는 점이다.
아르비엔야(4월 10일,, 시아 무슬림들이 추앙하는 이맘 후세인(서기 680년 사망)이 죽은 날로부터 40일째가 되는 날)를 기점으로 일시적으로 휴전협정은 미군의 공격으로 곧 깨졌다. 12일 밤부터 다시 바그다드-팔루자 체크포인트에서는 탱크와 F-16기를 동원해 팔루자 진입을 시도하던 미군과 무자헤딘의 교전이 격렬하게 벌여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원된 미 해병대가 탱크로 직접적으로 이 체크포인트를 넘어 팔루자 내로 진입해 공격하진 못했다. 그만큼 저항세력 무자헤딘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이 진입로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흐메드 노와프는 지난 8일, 팔루자에 있던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바그다드로 대피시키는 데까지 함께 동행했고, 이후 한 명의 친구와 함께 팔루자 긴급구호를 위해 다시 알-니에니아 사막을 거쳐 13일 팔루자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는 팔루자 인근에서 차를 버리고, 걸어서 팔루자 시내까지 들어갔다.

그는 거리에 썩어가는 시체를 수거하고 묻는 작업을 하느라 완전 탈진 상태였다. 그리고 함께 팔루자에 들어가 구호 작업을 하려던 친구는 미군의 저격수에 의해 사살됐다. 미군들은 탱크를 동원 팔루자에 직접적으로 진입이 불가능하자 헬기를 이용해 저격수를 투하, 팔루자 내 많은 건물들의 옥상에는 미군의 저격수가 배치됐다. 지난 8일 미군은 팔루자 주민들에게 8시간 내로 팔루자를 떠나지 않으면 무장세력 무자헤딘으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현재까지 저격수들은 팔루자 거리에서 움직이는 모든 물체들은 사살시키고 있다. 저격수에 의해 사살된 아흐메트 노와프의 친구는 13일 팔루자 자신의 집에 도착한 즉시 사살됐고, 그의 아버지 또한 정원에서 이마가 명중되어 죽어가는 아들을 구하러 집밖으로 뛰어나가다가 같은 자리에서 사살됐다. 이 모든 상황을 노와프가 목격했고, 전화로 증언했다.

■ 기타

8일을 기점으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팔루자를 빠져나갔다. 팔루자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대부분 부족의 연장자(그들은 고향을 지키고자 하는 남다른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이거나 젊은 남자들이다. 이제 팔루자 주민들은 분노를 넘어서 죽음을 불사하고 미군과 대항한다, 이다. 길거리에 널린 시체들, 여자와 아이들을 상관치 않고 무차별 폭격과 사격, 이슬람 사원까지 공격하는 미군의 공격을 보며, 팔루자 주민들은 “우리가 죽은 것과 똑같이 미국에게 죽음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날까지도 팔루자 민간인 피해에 대해 외신보도들은 “3백명이상 사망자, 4백여명의 부상자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미군은 한번도 팔루자를 진입하지 못했고, 민간인 피해가 속출했음에도 불구하고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임무는 잘 진행되고 있고, 도시 안쪽으로 진격했으며 저항세력을 퇴각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시아파 성지인 카르발라와 나자프에서 연합군과의 충돌로 15명의 이라크인 사망, 21명 부상(알-자지라 방송)
-바그다드 내 북부지역 알-사드르시티에서 격렬한 전투 계속.

3. 팔루자 피난민 상황

3일에 걸쳐, 바그다드와 팔루자 인근 대피 장소를 직접 방문하여 파악한 피난민의 수는 첫날 70명, 둘째날 60명(이 마을에는 최소 500여명 이상의 피난민이 있었다), 셋째날 219명, 총 349명이다. 이 모든 대피처들은 민가에 최소 30명에서 많게는 70명씩 몇 가족씩 함께 있는 경우였다.
또한 바드다드에서 직접 방문하지 않았지만, 모스크 안에 대피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스웹시티의 알-사파 사원이 그곳이다. 140여가구 700여명으로 현재 알려진 장소 중에는 가장 큰 규모로 난민들이 한꺼번에 모여있는 경우다.
현재 바그다드 내로 피난한 난민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이 힘들다. 너무 넓은 곳에 대규모로 흩어져있으며, 그리고 모스크의 도움을 받아 대피하고 있는 경우는 파악이 되지만, 부족이나 가족의 도움으로 몸을 피하고 있는 경우는,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미군의 봉쇄는 4월 4일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한번 나왔던 피난민들의 경우, 봉쇄가 풀려 하루빨리 팔루자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다.

1. 첫날 방문한 곳은 바그다드 서부 하이-알-두바트(Hay-Al-Dubat). 방문날짜 4월 13일(화)
방이 두 개인 집에 70명이 머물고 있었다.

2. 둘째날 팔루자 인근 알-사그라위에 지역으로 팔루자에서 5km 떨어진 마을이다.
방문날짜 4월 15일(목)에서 17일(토) 까지 3일간.
이 마을에 최소한 한 가구당 40명, 50명 이상의 난민들이 대피하고 있다. 마을의 규모가 총 20여가구 넘는 걸로 추정되어 최소 500여명 이상이 대피하고 있다.
면접한 가족의 경우 60명이 대피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친인척들이다. 이들은 모스크의 도움이 아니라 바그다드에 거주하고 있는 부족의 도움을 받고 있다.

3. 셋째날은 첫날 방문한 곳에 난민들이 그 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하이-알-두바트를 방문했다. 방문날짜 4월 19일(월).
총 5 군데 직접 방문하여 219명을 만났다. 이날 만나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피난민의 경우 대다수가 여자와 어린이였다는 점이다. 현재 태어난 지 42일 되는 아이부터, 여섯달 난 영아들 또한 만났고, 80살이 된 시각장애를 가진 노인, 10살 소녀까지 인터뷰 할 수 있었다. 연령층은 다양했다.

문제는 바그다드로 들어온 난민의 경우에는 직접 방문과 면담이 가능하지만, 바그다드로 진입하지 못하고 사막에 갇혀있거나 피난 도중 실종, 사망한 수는 현재 파악이 불가능하다. 이 숫자도 꽤 된다. 미군은 펩시콜라 공장에 몇백 명의 피난민들을 가두고, 며칠째 감금하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 그 외 증언들

-4월 5일에 결혼식을 앞두고, 4일부터 축제를 열었던 커플이 5일 아침부터 있었던 공습으로 인해 결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피난을 나와 현재 바그다드에 대피하고 있는 예도 있었다.

-아이들의 증언

“큰 소리와 미군이 공격하는 소리를 듣고 있어요. 미군 전투기와 탱크 소리에요. 무서웠어요. 월요일 아침에 미군 전투기가 너무 많이 날아다녀서 그때가 가장 많이 무서웠어요. 힘들었던 건 사막 도로를 지날 때였고, 목 마르고, 배 고프고, 미군들이 무서웠어요. 아침을 못 먹고 팔루자를 떠났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길 위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고, 배가 고팠어요. 왜 미군이 팔루자를 공격했는지 모르겠어요. 미군을 싫어지기 시작했어요. 학교에 가고 싶어요. 가끔 학교 친구들이 생각나서 울어요. 그 친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하면 슬퍼요.” (여, 10살, 바툴-후세인, 하이-바잘 거주)

“총소리, 폭발음, 비행기 소리가 너무 컸어요. 우리 학교는 하이-아스카리에 있는 알-바자아 초등학교에요. 그런데 미군이 폭탄으로 학교 담장을 다 부수었어요. 미군은 학교에 숨어있다고 말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삼촌 집이 걱정이 되어서 삼촌 집에 갔는데, 미군이 삼촌집을 폭격했어요. 아버지와 삼촌은 도망쳐서 모스크 안으로 숨었어요. 모스크 이름은 알-하드라-알-무하마디야(Al-Hadrah-Al-Muhmadiyah)에요. 미군은 모스크들도 무자헤딘이 숨어있다고 폭격했어요. 그러나 아버지나 삼촌은 무자헤딘이 아니에요.”
(여, 9살, 하난-마지드, 하이-아스카리 거주)

-시각장애를 가진 노인의 증언
“우리 상황은 좋지 않다. 가족들이 다 헤어졌다.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조카 딸이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나는 계속 운다. 나는 죽고 싶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지금 죽으려고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다.(눈물을 흘림) 딸의 남편, 사위도 죽었다고 들었다. 아들들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죽고 싶다. 이런 삶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여성, 80세, 나쉬미야-압바스, 시각장애인)

이라크 평화 네트워크 (IPN) www.iraqnow.org 윤정은 작성.

출처 : 앙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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