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국인 신부의 기록. 인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했던

시노트 신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선배
들을 잊지말라”고 당부했다.” tt_link=”” tt_w=”219px” tt_h=”296px” tt_alt=”” />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 사건이다. 지난 1974년 5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 혐의로 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 등 8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9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처형된 8명은 국가전복 기도는커녕 ‘인혁당’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박 정권은 살인적인 고문으로 이들한테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완벽한 공안사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 사건으로 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됐다. 조작 사실이 드러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됐고 결국 5년 뒤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간첩조작 폭로 뒤 한국서 쫓겨나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조작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한 사람의 미국인 신부였다. 사건 당시 천주교 인천교구 총대리로 활동했던 제임스 시노트(76)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시노트 신부는 최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될 예정인 <1975년 4월9일>에서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밝혔다. 1975년 4월9일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날이다. 시노트 신부는 같은 해 4월30일 한국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인혁당 사건 발생 무렵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지난 2001년 함세웅 신부에 의해 ‘발굴’돼 최근 빛을 보게 됐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발표 한달 전인 1974년 4월 한 미국 대사관 직원한테서 “곧 대규모 간첩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를 막 발표한 시점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 직원을 평소 알고 지내던 미 군무원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가 그런 충격적인 얘기를 한 겁니다. 당시 미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의 정보요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가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라며 ‘얼마나 잘 꾸며내는지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날 술을 많이 마셨는데, 당시 미 대사관이 한국 정부의 못된 짓을 수수방관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M_ 내용 더보기 | 닫기 | 시노트 신부는 그 직원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달 뒤 그 직원의 말은 사실로 입증됐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는데, 어찌나 잘 꾸며대는지 나도 속을 뻔했어요. 그 신직수라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를 계기로 국내 천주교 신부들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힘썼다. 그때는 천주교보다는 개신교 목사들이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써서 불의에 저항하도록 촉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박형규 목사 등 개신교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을 무서워 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지만 당시 천주교는 비교적 조용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외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이 별로 없었죠.”

시노트 신부의 외침은 함세웅 신부 등 젊은 사제들의 호응을 받았다. 시노트 신부와 뜻을 같이한 외국인 신부들은 함 신부 등 국내 젊은 사제들과 함께 기도회 등을 열며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과 영국의 기자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우리말 실력이 뛰어난 시노트 신부는 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지원한 미 정부 상대로 투쟁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1년 뒤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1975년 4월8일 대법원 선고를 직접 지켜봤는데, 사형 확정을 선고하는 민복기 대법관의 목소리가 개미 목소리처럼 작았습니다. 자기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없었던 거죠. 법대에 앉아 있는 대법관들의 모습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사형은 대법원 선고 뒤 19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집행됐다. “그날은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죠. 박정희 정권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투사가 됐다. 1961년 인천 영종도 성당의 주임 신부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전까지는 목회활동에만 전념했던 평범한 신부였다. 그는 인혁당 사건 이후 각종 민주화 집회에 참석해 당시 외신에 보도된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폭정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전했다. 그의 반독재 투쟁은 결국 박 정권의 비위를 거스르고 말았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지 20여일 만에 강제추방을 당했다. “추방당하고 나서 미국의 교회와 학교, 기타 여러 모임에서 박 정권의 폭정을 고발했습니다. 미국 정부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박 정권에 대한 지원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박 정권의 비리를 얘기해도 미국 정부 책임자들은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박 정권이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박 정권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미국 정부가 문제였던 겁니다.” 그 뒤 시노트 신부의 투쟁 대상은 미국으로 바뀌었다. 각종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다 10번이나 구속당했다.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던 1979년 어느 날 박정희가 피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의 마음의 고향인 한국에서 드디어 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들떴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미국 정부의 무책임한 대외 정책의 산물입니다. 반공 정부라면 그것이 독재정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원했기 때문에 무수한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겁니다. 미국 정부는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 시민들의 권리를 짓밟고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 사태도 마찬가지예요. 부시 정권은 미국과 전세계 시민들을 속이고 있어요. 미국의 보통 사람들은 테러 위협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부시 정권에 속고 있습니다. 마치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장해 민주주의를 탄압한 박정희 정권 때처럼 말이죠.”

시노트 신부는 2002년 민주화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20여년 만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제2의 고향인 한국에 정착했다. 그와 사제단과의 인연은 가족간의 그것만큼이나 각별하다. “사제단은 감히 정의를 말하기 힘들었던 혹독한 시절에 정의를 외친 분들입니다. 소수였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강했죠. 이분들이 없었다면 이 땅의 민주화는 그만큼 더뎠을 겁니다.” 사제단은 지난 9월26일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최종길 교수 간첩 조작 사건도 시노트 신부의 ‘작품’이다. 1973년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조작 의혹을 제기했는데, 시노트 신부가 이를 사제단 신부들에게 전해준 것이다. “당시 미군에는 라는 소식지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최 교수 사건의 본질을 알게 됐어요. 한국 사람들은 언론 통제 때문에 외신을 접할 기회가 없었죠. 는 미군 관계자들을 상대로 한 일종의 정보지였는데, 나와 친한 미 군무원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되니까 한국 정부는 미국 민간인들이 를 못 보게 하도록 미군에 요청했죠.”

“박근혜 대표 영향력 이해하기 힘들죠”

시노트 신부는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모습을 언론 매체를 통해 접할 때마다 불편하다고 한다. “그분은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에게 가서 진솔하게 사과해야 합니다. 유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장본인의 딸이니까. 그런데 사과는 하지 않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시노트 신부에게 최근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박정희 향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박 대표가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죠. 한국 사람들이 박 대표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미국의 보통 사람들이 부시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출처: 한겨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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