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않은 직업.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

오래전에 공중파에서 퇴직하시고, 당시 내가 잠시 머물었던 케이블 방송국에서 영업을 뛰시고 계시는 공중파 대선배가 계셨다. 당시 연세는 50이 되어가시는데 무척 감각있고 쿨한 분이셨는고, 게다가 유머감각도 대단하셔서 모든 직원들이 좋아했다. 배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배선생님은 우리나라의 초기 연예계의 역사의 가운데에 계셨다. 가끔 술자리에서 들려주시는 힘들었던 시절의 연예계 소사들과 최근의 연예계 비사(秘史)등을 듣고 있노라면, 밤새는 줄도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그분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특히 박통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던, 심수봉씨를 사건당시 잘 설득해서 증언을 하게 만든 사실을, 그분이 연예계에 몸담으셨던 그 오랜 기간중 가장 뜻있는 일로 생각하고 계신다.

그분과 무척 친해졌다고 생각하던 비오던날 바닷가 술자리 였던걸로 기억한다. 나는 여느때와 같이 얼큰해져서 기분 좋아지신 그분께 또 여러가지를 묻고 있었다.

어느 가수가 이렇다던데 그거 정말인가요?.. 어디서 들어보니까 이 배우는 원래 ~ 라고 하던데 그거 확실한 건가요?

그런데 이분이 그때부터 꿀먹은 벙어리다.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 무슨 기분나쁜 일이라도 있으신지 미간도 찡그리신다.

창윤씨…

한참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후에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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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부터 하는 이야기..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기 바래요. 창윤씨도 언론에 계신분이고 그래도 제가 그쪽 밥 오래먹은 선배로 하는 말이니까…

제가 일했던 이 연예계쪽 일은 말이지요. 여러 사람들에게 연예계의 소식과 대중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지예요. 이건 참 화려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보직이기도 하지만, 이것만큼 조심스러운 보직도 없어요.

내가 쓰는글. 내가 보도한 내용이, 한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한사람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지요. 한 연예인의 생명이기 전에 한사람의 운명을 다루는 보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쓰기전에 더 알아보고 더 신중하게 확인에 확인을 거쳐서 지면이나 티비에 내보냈어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지, 자신이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어떤 특정인을 죽여서야 되겠어요? 아무생각없이 던진 돌 하나가 물속의 고기를 죽여서야 되겠어요? 판검사만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게 아니예요. 창윤씨. 이쪽 일도 그렇거든..

그렇게 이쪽 밥을 먹게되면 자연스럽게 보도해야 하는 내용 외에 많은 내용들을 알게 되요. 그런데 이 내용들을 마치 자랑스럽게 사석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떠벌이는 사람이 있지요. 누가 사실은 누구 첩이라더라. 누구는 사실은 욕쟁이에 헤픈 여자라더라.. 물론 묻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분명히 그 공인에 대한 사적인 내용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권리는 없어요.

그건 분명히 그사람을 죽일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그사람의 인격이나 인권을 유린할수 있는 일이예요. 그건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내용도 아니거든요. 공인이라고 해서 완벽한 신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분명히 그들도 실수를 할수 있고, 밝히기 힘든 떳떳하지 않은 과거가 있을수도 있어요. 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지고 확인되는 공인의 삶을 이미 아는데, 그런 그들을 더 발가벗길 필요가 있을까요?

경찰들도 가해자나 피해자나 그 사실에 대해서만 법을 적용할뿐, 수사하면서 밝혀진 사실 외에는 모두 비밀을 지킵니다. 그건 경찰들이 지켜야할 업무 윤리이지요.

일부 젊은 연예계 기자들이 보면, 사석에서 자기가 알아내거나 알게된 그런 공인들의 사적인 것들을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됩니다. 전 그런 기자후배들이 참 안타까와요. 인간 으로써의 도덕을 이야기 하기전에, 언론인의 기본적 직업관이나 윤리관이 결여된 사람들이예요.

결국은 그 개인의 자질문제지요. 그런 친구들때문에 연예계 기자들이 <연예인 피 빨아먹는 흡혈귀>니 <연예계 기자들은 기자도 아니다>란 말이 나오는거 같아요. 보도 할건 하고 지켜줄건 지켜줘야지 말이지. 자랑스럽게 그런 이야기들 사석에서 떠벌이는 기자.. 결국은 자기 얼굴에 침뱉는것인줄 왜 그렇게 모르는지 모르겠어요. 안그래요? 창윤씨?

그러고 보니 그 수많은 술자리에서 배선생님은 한번도 어떤 연예인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한것 같다. 그리고 그런 철학이 배선생님이 30년 넘게 그쪽의 거두가 되신 비결인듯 싶다.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또 그런 나를 배려하시듯이 허허 큰소리로 웃으시면서, 내 어깨를 큰 몸짓으로 턱 – 턱 치시더니, ” 자. 한잔 받아요. 허허허!” 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크게 웃으신다. 그때 그 배선생님이 그렇게 크게 보인적이 없었다.

그래.. 맞다. 업무상 알게된 정보를 잘 가공해서 기사화 하는것도 기자의 의무지만, 업무상 알게된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해 주는것도 언론인의 기본윤리며 배려다. 연예인들의 그런 치부를 많이 알수록 그것이 마치, 자신의 대단한 능력(能力)인냥 술자리 같은곳에서 떠벌이듯 과시하는 아름답지 않은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 비단 기자들 뿐이랴.

그리고 아마 그때 즈음 부터, 나 또한 비슷한 질문을 받게 될때면, 그냥 바보처럼 미소만 짓기 시작한것 같다. 아아. 배선생님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그후로 서울의 위성 전문방송국으로 옮겨가신후 연락이 끊긴지 오래다. 건강하신지.. 아직도 그렇게 큰 소리로 허허 사람좋게 웃으시던 세칭 아름답지 않은 직업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 거인(巨人) 배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밤이다._M#]

2 thoughts on “아름답지 않은 직업.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

  1. 아! 그분! 개인적으로 말씀 나눌 기회가 없어서 저에겐 정말 재미있으신 분이었다는 기억밖엔…^^; 대단한 분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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