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 1 / 잊혀진 애국자 간송 전형필 선생님

全鎣弼 1906∼1962 문화재 수집가. 호는 간송(澗松). 서울 출생. 1921년 어의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다니면서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 후 귀국하여 고희동(高羲東)·오세창(吳世昌)의 감화로 조선의 옛 미술품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사설박물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34년 성북동에 부지를 마련, 38년 한국 최초의 사설박물관인 보화각을 설립하고 그 뒤 문화재 수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40년 관훈동(寬勳洞)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하여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 장차 연구에 대비하였다. 또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院)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고 육영사업에 착수하였다. 8·15 후에는 보성중학교 교장을 잠시 역임하고 54년 문화재보존위원회 제 1 분과위원에 피촉되기도 하였다.

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고고미술동인회를 발기하여 운영을 담당하였다. 죽은 해인 62년 8월 15일 문화포장이 추서되고, 64년 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설립한 보화각은 뒤에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어 그의 사후에 세워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설로 운영되고 있다.

일제 암흑기에 민족 문화재를 수호한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 (澗松 全鎣弼)은 서울 종로에서 통정대부중추원의관(通政大夫中樞院議官)을 지낸 전영기(全泳基)의 2남4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10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은 간송은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후 25세 때부터 민족문화재를 수집,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데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그는 고증학자 오세창(吳世昌)과 교유하며 전통 문화의 단절을 막기위해 1934 년 북단장을 개설, 1938년2월 일제의 강압적 물자통제령에도 불구하고 와세다 재학시절인 1927년, 그 안에 우리나라 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보華閣)’을 세워 문화재를 수장, 연구, 복원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했다. 또한 1940년엔 우리 전통문화를 계승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동성학원을설립하고 보성중학교 (普成中學校)를 인수하는 등 육영사업에 착수했다. 광복후인 1960년엔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해 동인지 ‘고고미술’을 발간했다.

간송(澗松)의 뜻에 따라 북단장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보화각은 부속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런분들 티비에서 한번 드라마로 만들면 좋을텐데. 젊은 녀석들 비현실적인 사랑놀음 같은거 집어치고… 우리것에 대한 소중함. 근대사 일본제국주의의 착취의 현장. 그리고 가진자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에 대한 문제제기까지.. 티비는 이런거 제작안하면 뭘 하느냔 말이지.

한국에서 이미 일제시대때 세계최초.최대의 소더비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경매가 있었다는 사실과 그 가운데 이런 애국자분들이 사재를 털어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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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경, 서울 대화정(지금의 필동)에 사는 마에다사이이치로는 비취색이 바다같이 펼쳐진 청자매병(靑磁梅甁)을 두 손으로 돌려보고 있었다. 두 눈은 아름다움에 홀려 가지런히 떨렸다.

“햐! 천 마리의 학(鶴)이 날고 있소.

“빼어난 아름다운 선, 맑고 푸른 때깔, 미인의 어깨가 연상되는 견부(肩部), 흑백의 원형이 이중으로 상감(象嵌) 처리된 우수한 문양, 원형 가운데는 구름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학이 한 마리씩 그려져 있는 천하 제일의 청자매병(靑磁梅甁)이었다.

마에다(前田)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줄곧 침을 삼켰다.

“마에다(前田)상, 정말 대단한 물건이지요? 고운 때깔과 문양, 조화로운 형태에 그저 놀랄뿐입니다, 헤헤.”

마에다(前田)의 얼굴과 매병을 번갈아 살피던 박재표(朴在杓)가 초조한 빛을 거두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는 매병의 주인인 신창재(愼昌宰)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말 훌륭한 청자매병이오. 조선의 도자기를 많이 보았으나 이처럼 훌륭한 것은 처음이오. 군계(群鷄)는 일학(一鶴)을 당하지 못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매병(梅甁)은 수많은 학들이 줄지어 푸른 하늘을 나니, 이 나라 최대의 명품이요 걸작품입니다. 정말 대단한 물건이군요.”

마에다(前田)는 눈이 부시도록 푸른 청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채 두 손으로 매병(梅甁)을 받쳐들고 감탄을 연발했다. 마에다가 병을 빙글빙글 돌리자 원형 가운데서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마흔 여섯 마리의 학(鶴)과 그 원형들 사이에 무수히 흐르는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스물 세 마리의 학(鶴)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수천 마리의 학이 구름을 뚫고 창공을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또∼, 어떤 경로로 입수했습니까?”

조선사람이라면 첫 대면부터 얕잡아보는 것이 일본인의 생리였다. 그러나 천하의 명품을 가지고 온 조선사람에게, 마에다(前田)는 비굴할 정도로 굽실거렸다.

“얼마전 일본인에 의하여 개성 근교에서 발굴되었다 합니다.”

“하이, 그렇습니까? 개성이라면 고려왕조가 있었던 곳 아니요?”

“맞습니다. 바로 왕씨가 세운 고려가 있었던 곳이지요.”

호화찬란한 문양만으로 이미 그 시대의 문화수준을 알려주고 있는데도 박재표(朴在杓)는 그저 마에다(前田)에게 청자매병을 잘 보이려는 마음에 부연설명까지 했다.

“저도 많은 고려청자를 보았지만 이같은 명품은 처음입니다. 이것은 가품(佳品)도 진품(珍品)도 일품(逸品)도 아닌, 말그대로 명품(名品)입니다.”

“그런데 어찌 동체에 철장(鐵杖) 자국이 있소?”

역시 마에다(前田)였다. 감탄하는 표정으로 들여다보더니, 드디어 신부의 값을 깍기 위한 고단수의 한 점을 둔 것이다.신창재(愼昌宰)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갖은 자랑을 해대던 박재표(朴在杓)도 기세가 한풀 꺽였다.

“장미에도 가시가 있기에 꽃이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박재표(朴在杓)가 지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춰 애써 한마디 덧붙였다.

“글쎄요. 아무리 아름다운 미인이라도 얼굴에 손톱자국이 있으면 제구실을 못하는 법이지요.”

마에다(前田)다운 일갈이었다.

“하늘이 내린 기회에는 반드시 그런 연유가 있는 법입니다. 때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응수를 하는 박재표(朴在杓)의 말에도 가시가 돋쳐 있었다.
마에다(前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신창재(愼昌宰)의 표정을 살폈다.

신창재(愼昌宰). 그는 해방후에 자기의 모든 소장품을 한푼도 받지 않고 고려대학에 기증한 인물이다. 대구에서 치과병원을 경영하는 의사로서 골동품에 대하여 대단한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신(愼)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마에다(前田)가 다소 여유를 부리며 신창재(愼昌宰)를 건너다 보았다. 신창재(愼昌宰)는 심호흡을 한번 하더니, 나무에 못을 내리치듯 냉정하고 직선적으로 대답했다.

“세상 물건에는 모두 주인이 있는 법입니다. 주인이 아니거든 무르시지요.”

명쾌한 응전이었다. 마에다(前田)가 흠칫했다. 그때까지 매병의 약점을 잡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던 마에다(前田)는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박재표(朴在杓)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박재표(朴在杓). 그는 이 나라 고서화의 대 수장가로 일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고서화라면 진도 갑부 손재형(孫在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의 소장품 일부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렸을 만큼, 그 방면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다 이날은 도자기를 중매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자신의 소장품에 자부심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자, 훌륭한 신부일수록 세상에 많이 내보이면 진가가 떨어지는 법입니다. 처음 대하는 분들도 아닌데, 적당한 선에서 서로 양보하십시오.”

마에다(前田)의 얼굴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나 신창재(愼昌宰)의 표정은 요지부동으로 굳어 있었다. 마에다(前田)가 조심스럽게 신창재(愼昌宰)의 눈치를 살폈다.

“신(愼)선생, 우리 잘해봅시다.”

그때 박재표(朴在杓)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두 사람의 말을 가로챘다.

“마에다前田)상, 이 천하의 명품에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분위기도 바꿀 겸 먼저 이름이나 정합시다. 혼처를 고르면서 신부 이름도 없으니 어디 있을 얘깁니까? 한낱 필부의 여식에게도 이름이 있는데, 이 귀공녀에게 이름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그러자 신창재(愼昌宰)의 얼굴에도 희색이 감돌았다. 뜻밖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훌륭하면 원래의 이름에 자(字)를 포함하여 호(號)까지, 부르는 이름이 못되어도 서너개는 된다. 신창재(愼昌宰)는 이 천하의 명품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저 정례대로 붙이자면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이지요.”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 새새롭고 그럴듯한 이름이 없을까? 이 운학문매병의 아름다움을 한마디로 절묘하게 표현한 그런 이름이…. 마치 번개가 번쩍한 후 천둥소리가 들리기 전까지의 팽팽한 긴장감과도 같은 기운이 방안에 가득 맴돌았다.

“천학! 천학매병(千鶴梅甁)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침묵을 깨며 크게 소리친 사람은 마에다(前田)였다. 천학매병(千鶴梅甁). 모두 무릎을 치고 그 이름에 동의했다. 기가 막힌 이름이었다. 어찌 먼저 그 이름을 생각하지 못했던가? 박재표(朴在杓)와 신창재(愼昌宰)는 얼굴까지 화끈 달아올랐다.

“천학매병(千鶴梅甁)!”

비록 천 마리의 학이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병을 돌려가며 보던 천 마리가 아니라 수천 마리 학떼가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닌가?

마에다(前田)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도 참으로 절묘한 착상이었다는 생각에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그는 이 매병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름이 정해지자 이 천하의 매병은 어렵지 않게 마에다(前田)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천학매병(千鶴梅甁)은 어느 도굴꾼이 개성 근처에서 파내어 골동상에 선을 보였다. 그때만 해도 조선사람으로 골동을 취급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따라서 대개 중요한 유물들은 일본인 수장가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 매병도 몇 사람의 거간꾼을 거쳤는데, 한 거간꾼이 자기의 고객이며 대 수장가인 일본인 수집가에게 팔아먹으려고 대구로 가지고 갔다.

자칫하면 다시는 이 나라에서 이 천하의 매병을 볼 수 없을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던지, 그 거간꾼이 대구에 내려가보니 그 일본인 수장가는 이미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 고객으로 정했던 일본인이 일본으로 가고 없자 거간꾼은 하는 수없이 꿩대신 닭이라고 신창재(愼昌宰)를 찾아왔고, 가까스로 4천원을 받아갔다. 그것이 바로 이 천학매병이었다.

“간송(澗松)선생, 이 물건은 꼭 잡아야 합니다.”

“총독부 박물관에서 1만원까지 제시하며 사람을 보냈지만, 마에다(前田)상은 팔지 않았습니다.”

“마에다(前田)상은 좀체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에다前田)상이 이 물건을 신창재(愼昌宰)라는 사람에게서 살 때 자금압박을 상당히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지부동입니다. 마에다(前田)는 이 물건에 대해 대단한 자신을 가지고 있어서, 이 기회에 일대 도박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명품중의 명품이라 반드시 이 물건에는 임자가 있지요. 어쩌면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일본인이라는 말에 간송(澗松)선생이라는 사람이 잠시 눈을 껌벅였다.

“그는 이 물건을 고려청자로서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희대의 거물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물건엔 자신이 있고, 크게 출세를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파는데도 서둘지 않습니다. 가격도 일품인 청자운학문매병(靑磁雲鶴梅甁)보다 열배는 호가하고 있습니다.”

심보기조(新保喜三). 그는 소화통(昭和通, 지금의 퇴계로)에서 ‘온고당(溫古堂)’이라는 골동상을 경영하는 일본인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심보(新保)의 맞은편에는 서른도 채 안된 청년이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가 겸손하고 온유하면서도 가슴에는 불덩이같은 열정을 지닌 큰 그릇임을 알고있는 심보(新保)는 그의 인품을 마음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전형필(全鎣弼)
그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문화재 수집에 전력을 다하는 젊은 실업가며 대수집가이다. 고유섭(高裕燮)과 송석하(宋錫夏)가 유형, 무형으로 문화유산을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며 우리의 뿌리를 잇고자 했다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은 개인적인 상속재산을 이용하여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인텔리로서 민족혼을 지킨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있었다. 상당한 재산가만이 가능한 민족문화재 수호에 자기 재산을 가치있게 쓰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서화와 고서로부터 출발한 그의 수집은 차차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 및 기타 불교문화재로까지 확대되었고, 그 안목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인 취향이나 만족감이 아닌 민족유산 보호의 사명감이요, 하나의 항일투쟁이었다.

간송(澗松)이 잡은 물건은 예외없이 이 나라 최고의 걸작품들이었다. 그는 어쩌다 일본인에게 놓친 물건이 있으면 사력을 다해 다시 사오는 불굴의 의지도 가지고 있었다.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수집한 간송(澗松)의 컬렉션은 급속도로 내용이 풍부해졌다. 1930년 중반에는 이미 개인적인 미술관시설이 필요할 정도였다.

“저희 일본인 중에서도 그 물건에 대하여 군침을 삼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값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지요. 함부로 덤벼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보(新保)는 충정어린 목소리로 간송(澗松)을 설득했다. 간송(澗松)은 심보(新保)의 그런 면을 신뢰하고 있었다.간송(澗松)과 심보(新保)는 처음 손님과 골동상의 관계로 만났다. 그러다가 얼마 후, 남 앞에 나서기 싫어했던 간송(澗松)은 심보(新保)를 통해 고미술품을 수집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개인박물관을 꾸며볼 생각이니 심보(新保)상이 도와주시오. 당신이 속이거나 말거나 나는 당신을 믿을 작정이오.”

이말에 감동한 심보(新保)는 철저한 신용으로 간송(澗松)의 고미술품 수집에 독점적으로 관여했다.심보(新保)는 경성미술구락부 회원으로 가입하여 구락부에서 경매되는 골동품을 간송(澗松)을 대신해 사모으기도 했다.

“한번 봅시다.”

무거운 입이 열렸다. 결심의 소리였다. 간송(澗松)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결정이고 확신이었다.

“마에다(前田)상, 물건을 제게 건네주시죠.”

“무슨 말씀을.. 아직 더 곁에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소. 워낙 명품이라 그냥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고 넉넉합니다. 팔고 나면 허전하여 내 목숨이 10년은 줄거요.”

“어차피 그런 큰 물건은 마에다(前田)상이 가지고 있기엔 버거워요. 적당한 임자가 나타났을 때 파는 것이 우리의 상술 아니겠소?”

“내가 지금 중간에 서고 있으니, 넘기시오!”

심보(新保)가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다그쳤다.

http://www.posung47.com/html/ikk%20menu.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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