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품 헌법과 해적판 헌법

찜통처럼 찌는 더위에,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정체성’ 논란에 불을 지펴 전국을 한증막으로 만들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마구 흔들리고 있단다. 그래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려 자신이 나섰다는 것이다. 날씨만 선선했어도 조국을 구하겠다는 이 가상한 기개를 그냥 웃어 넘겼을 게다. 그런데 웬 날씨가 이리 더운지, ‘전면전’ 운운하는 이 성처녀의 뜨거운 애국질에 그만 혈압이 올라가고 만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웬 이념 논쟁? 대화와 타협을 말하던 분이 저러는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다. 일단 제1야당의 대표로 뽑혔으니 그 기념으로 현직 대통령에 맞서는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또 대통령을 상대로 일단 싸움판을 벌여놓으면 당내의 불만 세력도 어차피 자기 주위로 결집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느닷없는 이념 논쟁을 벌여 당의 안팎으로 제 입지를 굳히겠다는 계산이다.

노렸던 효과를 다 본 걸까? 박 대표는 젊은 의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면전은 하지 않겠다며 ‘내전 선언’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 문제, 이대로 그냥 넘어가야 할까? 이왕 국가의 정체성에 의혹이 제기되었으니, 이런 소모적 논란의 반복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 도대체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을 알려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헌법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 헌법의 전문을 보자. 거기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 그런데 그 법통을 이으려고 친일진상 좀 규명하자는데 극렬하게 저항하는 위헌적인 분들이 있다. 누구더라? 또 우리 헌법의 전문은 ‘정의와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는 북한 얘기만 나오면 ‘주적’ 운운하며 ‘민족의 대단결’이라는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분들이 있다. 누구더라?

우리 헌법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의 정체성을 바로잡겠다고 설치는 분들의 정신상태는 어떤가? 헌법이 규정한 4·19 민주이념은 안중에도 없고, 외려 헌법에 들어있지도 않은 5·16 쿠데타에서 이 나라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툭하면 국가의 정체성이 어쩌고 하는 그 분들이 정작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에는 사실상 헌법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온 국민의 합의로 씌어진 대한민국의 성문헌법. 이 정품 헌법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3·1 운동’ ‘4·19 민주이념’ ‘민족의 단결’ ‘세계평화’ 등에서 찾는다. 다른 하나는 눈이 오른 쪽으로 심하게 쏠린 우익 가자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불문헌법. 이 해적판 헌법은 5·16 쿠데타, 국가보안법, 한미동맹 같은 데서 국가의 정체성을 찾는다. 이렇게 헌법이 둘이다 보니 국가의 정체성을 놓고 늘 논란이 벌어지는 것이다.

박 대표가 신봉하는 헌법은 어느 것일까? ‘4·19 민주이념’으로 쓴 공식 헌법? 아니면 5·16 정신에 바탕을 둔 사제(私製) 헌법? 아무리 생각해도 박 대표는 국가의 정체성을 거론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정치적 후광을 이루는 박정희는 관동군 중위로 히로히토에 복무하고, 남로당 군책으로 김일성에 충성하다가, 5·16 쿠데타로 헌정을 파괴하고, 유신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부정했던 분이다. 이 화려한 행적 중 과연 어느 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부합한단 말인가?

그러잖아도 최근 우익 가자미들이 ‘사제 헌법’으로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대학교수가 강단에 서서 군부에 쿠데타를 촉구하고, 시사월간지가 버젓이 군부의 반역을 부추기며, 퇴역 군인들이 신문 광고로 군부를 향해 정부에 불복종할 것을 공공연히 선동한다. 이 우익 광란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려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뒤흔드는 해적판 헌법부터 잠재워야 한다. 헌법은 웬만하면 정품 쓰자.

/문화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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