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 장명부 이야기

우리나라 역사상 한투수가 이토록 완벽하게 리그를 지배한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장명부’. 선동렬,최동원의 전성기엔 상대는 그 날만 포기하면 됐지만 장명부는 완봉승을 거두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실로 그는 초인 아니 마인이었다.

1968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난카이(73년), 히로시마(77년)에서 선수생활을 한 그는 82년 3승11패의 성적을 마지막으로 은퇴의 길을 택한다. 말 그대로 한물 간 투수였던 것이다. 이때 82년 최악의 성적을 거둔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가 그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83년 삼미는 천문학적 액수인 4000만엔 (1억2천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그를 영입했는데 당시 국내 최고 연봉선수였던 박철순의 연봉은 2천4백만원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인가. 게다가 주택까지 제공되었다.그만큼 삼미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장명부의 입단과정도 그리 순탄치 만은 않았다. 그의 한국행이 결정되자 삼미는 기뻐서 신문에 대서특필을하기 시작하는데 오래간만에 비보가 아닌 주제로 신문에 삼미의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한국에 가기로 하고 난 후 계약날짜가 남아 있자 장명부는 당시 일본에서 전훈중이던 삼성의 스프링캠프를 찾아가 배팅볼투수를 자청하며 삼성타자들을 상대로 배팅볼을 던져 준다. 이에 삼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미에게는 “나 아직 계약 안했는데”라며 응수해 삼미를 더욱 긴장시킨다.하지만 장명부는 배팅볼을 던져주며 이만수,장효조등 국내 최고 삼성의 막강타선을 분석했던 것이다. 그래서 타격의 달인 장효조도 전기리그에 서 그를 상대로 15타수 1안타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장명부는 “20승은 기본,30승이 목표다. 20승도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고 말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다. 삼미의 허영 사장과 KBO 이호언 사무차장은 장명부의 승수를 놓고 30승은 힘들고 박철순의 24승 정도를 예상했다. 이를 들은 장명부는 허영사장에게 만약 30승을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다.이에 허사장은 어차피 30승은 불가능 할꺼란 생각에 농담조로 “30승을 하면 1억원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말한다.이렇게 농담조로 말한 허사장의 약속을 장명부는 가슴속 깊이 새긴다. (이 약속이 나중에 삼미슈퍼스타즈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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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와서 구단에 상대팀 타자들의 자료를 요구했지만 그 당시 국내엔 그런 자료가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자료를 만들기로 하고 감독에게 시범경기에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경기에 출전시켜 달라고 한다.그리곤 시범경기에서 직구로만 승부하며 타자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만의 자료를 만들어 나간다. 시범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상대팀은 ‘장명부 별거 아니네’하며 방심한다. 이런 주도면밀한 계획이 있었기에 불멸의 30승은 가능했던 것이다.

시즌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꼴찌팀 삼미의 돌풍! 그 한가운데는 장명부가 있었다. 장명부는 완봉승을 하고도 다음날 또 던졌다. 순위 경쟁이 한창이던 8월에는 나흘 연속 등판해 완투승, 2이닝 마무리, 2.1이닝 마무리, 완투승이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00게임중 60게임에 등판해 30승16패6세이브를 기록했는데 몇이닝이나 던졌을까? 요즘은 투수가 200 이닝을 던지면 대단한 투수로 인정을 받는데 그의 투구이닝은 자그마치 427.1/3이닝이었다. 정말 철완이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등판한 이유는 바로 돈 때문, 시즌 전 허영사장과 약속한 30승=1억 이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00게임에 정상적으로 출전해선 30승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곤 감독을 졸라 선발 중간 가리지 않고 등판해 목표인 30승을 이뤄내고 만다.

*여기서 잠깐 – 당시 삼미의 투수였던 분을 만난적이 있는데 당시의 장명부는 팀이 이기고 있는 게임에 구원등판해서 일부러 실점을 허용해 동점을 만들어 준 뒤 그때부터 전력투구를 해 선발투수의 승리를 가로채기도 했다고 한다. 30승 아니 1억원을 위해…

그의 엽기적인 시즌 기록을 정리해보자. *시즌 최다승-30승 *시즌 최다 선발-44게임 *최다 완투-36 * 최다 완투승26(5완봉승) *최다 선발승-28 *최다 투구이닝-427 1/3 *최다 타자-1,712 *최다 타수-1,559 *최다 연속게임 완투승-8 *월간 최다승-9승(5월) *최단기간 20승-115일(34게임) *최다이닝 완봉승-12이닝 <=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한국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작성한 그는 올스타전에 팬투표로 뽑혔고 골든글러브 투수부분을 당연히 수상했다. [caption id="" align="alignright" width="145px" caption=" "][/caption]그럼 그가 어떻게 이런 대단한 성적을 낼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그는 철저한 승부사였다. 말만 프로야구였지 아마추어 야구와 별다르지 않았던 한국 프로야구에 진정 프로야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것이다.

선발로 나가면 완투, 마무리로 나가면 세이브로 보통 땐 슬슬 던지다 위기 땐 전력 피칭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당시 국내 타자들에겐 생소한 사이드암 투구 스타일과 쓰리쿼터형의 투구스타일을 변칙적으로 사용했고 145km의 빠른 직구와 낙차 큰 커브, 스크류볼 등 변화구의 완벽한 제구력과 능수능란한 완급조절 ,수읽기,틈틈이 던지는 위협구등 기존 국내 투수들관 비교도 안되는 무시무시한 투수였다.

지금도 ‘장명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빈볼’ 항상 빙글빙글 웃는 포커페이스인데다 상황에 따라 타자의 머리통을 향해 거리낌 없이 빈볼을 던지고 나서 놀란 타자를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마치 ‘너구리’같아 ‘너구리’란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 결과 집단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관중들에게 야구장서 격투기를 감상할 수 있는 팬서비스도 보여줬다. 이런 장명부에게 인천팬들은 ‘너구리’라면을 BOX채로 선물 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빈볼도 그는 아무때나 던지는 것이 아니었다. 막상막하의 경기서 상대팀이 대타를 자주 기용해 엔트리 대부분이 출장했을 때 빈볼을 던져 상대팀에서 빈볼을 맞아 부상당한 선수대신 대타로 내보낼 선수가 없게 되거나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 하는 경우를 노린 것이다. 모두가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처음가보는 구장에선 항상 공 세개를 홈플레이트에서 1루,3루,마운드 쪽으로 살짝 굴려보았다. 번트나 빚만은 타구가 나왔을 때 어떻게 타구가 흐르는지를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경기중엔 타자도 타자지만 다음 타자가 뒤에서 스윙연습 하는 것을 살펴봤다. 보통 자기가 좋아하는 코스로 스윙하기 때문에 거기로 안던지기 위함이었다. 타자도 보지만 다음타자까지도 봤다는 얘기다.

이번엔 그가 어떻게 무지막지한 연투가 가능했는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1번부터 9번까지 9명의 타자가 공격에 나서지만 타자의 역량은 모두 같지 않다. 1번은 빠른 타자고 3번은 잘치는 타자, 4번은 힘있는 타자다. 7,8번은 그팀에서 가장 타격이 약한 선수들이다. 내가 많은 횟수를 던지고 연투할 수 있는 것은 힘을 조절하기 때문이다. 3~5번 정도의 타자와는 전력승부를 하지만 하위타자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9회를 완투해도 조심해서 상대하는 경우는 10번 미만이다”

어쨌거나 이런 장명부의 활약으로 삼미는 좋은 성적을 냈지만 악재가겹치면서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하고 만다. 다음 시즌인 84년 역시 그의 어깨에 삼미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83년 30승을 올릴 경우 1억원의 보너스를 지급 하겠다던 혀영사장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당초 농담으로 했던 말이 현실로 다가오자 허사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1억원 보너스약속은 정식 문서에 의해 작성된 옵션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단 운영비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하지만 장명부는 허사장에게 집요하게 돈을 요구했다.어쩔 수 없이 허사장은 그 금액의 일부를 주고 장명부를 달래야 했다.그돈은 허사장의 사비였다고 한다.이에 회의를 느낀 장명부는”한국 야구가 아무리 너절하기로서니 사장까지 실언을 하느냐.모두가 거짓말쟁이”라며 비난했다. 장명부는 구단과 한국야구계를 비난하며 태업을 벌였고 전년도 무리한 탓에 성적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13승 20패 7세이브 방어율3.30으로 성적은 악화되었다. 또한 투수코치를 겸한 장명부는 팀내 라이벌인 임호균을 롯데로 트레이드 하고 박정후,정성만,신태중 등을 받아 들여 키우려고 했지만 이들 셋이 거둔 승수는 14승27패에 불과했다. 결국 팀은 다시 꼴찌로 추락하고 말았다.

시즌뒤 삼미와 장명부는 지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지난해 성적의 반에도 못미치는 성적을 올린 장명부는 시즌전 연봉계약시 약속한 벌금과 구단의 연봉삭감 방침에 맞선다. 선수분 3천만엔(약1억5백50만원),코치분 3천만원을 합친 1억3천5백50만원을 받았던 장명부는 20승을 못올릴 경우 1만달러(약8백만원)의 벌금을 내기로 한것이다. 장명부는 벌금은 내겠지만 연봉 삭감에 대해선 강력히 거부한다.당시 김진영 감독도 팀이 꼴찌를 한 책임을 지고 연봉에서 500만원을 감액하기로 했는데 장명부는 워낙 연봉이 많았기 때문에 구단은 훨씬 만은 금액을 삭감하려한 것이다.(김진영 감독의 연봉은 2천4백만원) 이과정에서 구단과 장명부는 감정이 상해 구단에선 그를 보류선수로 묶겠다고 한다.이에 장명부는 법적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버틴 것이다. 결국은 2,800만원이나 삭감된 1억7백 50만원에 계약을 하고 만다. 이번엔 구단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장명부는 삼미라는 구단에 정이 뚝 떨어져 버렸다.

85년에도 장명부는 고단수의 연봉협상 끝에 전년대비 28%인상된 3천2백만엔(1억1천8백만원)을 받는 대신 시즌 성적이 14승 이하일 경우 위약금 4천만원, 15~19승일 때 위약금 1천6백만원을 구단에 납부하고 20~24승일 땐 보너스 1천6백만원, 30승 이상일 땐 보너스 6천만원 추가의 옵션계약을 맺었다. 또 2세이브는 1승으로 치기로 했다.

이렇게 계약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동계훈련을 하지 않아 구위가 현저히 떨어지고 말았다.오로지 장명부만 믿고 있었던 삼미는 장명부의 부진으로 팀이 뒤죽박죽 돼 ‘1인 의존’의 피해를 절실히 당하고 만다.상대팀들은 이런 삼미의 사정을 알고는 삼미에 지는 것은 수치라고 여기며 전력을 다해 철저히 삼미를 짓밟았다.

85시즌 중 팀은 청보로 넘어갔는데 시즌이 끝나자 청보는 폐품이 되어 버린 장명부의 처리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시즌전 연봉 협상에서 합의한 옵션에 성적이 못미친 것이다. 11승 25패 5세이브로 2세이브를 1승으로 쳤을 때 13.5승이 돼 장명부는 구단에 4천만원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것이다.이에 청보는 장명부에게 엄청나게 삭감된 86연봉을 제시해 장명부가 이를 거부하자 11월22일 미련없이 자유계약 선수로 풀어 버린다. 결국 장명부는 86년엔 인천을 떠나 대전 빙그레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하지만 이미 퇴물이 된 그는 86년 빙그레에서 1승 18패로 최악의 성적을 냈다. 이에 빙그레에선 연봉 전액(7천5백만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지만 이미 그에겐 반액도 반환할 능력이 없었다. 지난 4년간 5억 9천만원이 넘는 돈을 한국에서 벌었지만 씀씀이가 너무 큰 탓에 빈털털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사기를 당하고 빚보증까지 서 결국 월세 20만원짜리 하숙집을 전전하는 신세까지 되어 버렸다.

빙그레에서 쫏겨난 그를 삼성의 박영길감독이 코치로 쓰려했으나 그의 나쁜 이미지 때문에 구단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다.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투수를 지도하다가 88년 인스트럭터 자격으로 삼성의 투수들을 지도했지만 연봉문제로 끝을 내고 롯데 투수코치를 맞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91년 5월 마약상습복용으로 구속되며 쓸쓸히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직도 사람들은 삼미 슈퍼스타즈를 말하면 ‘너구리 장명부’를 떠올린다. 그만큼 당시 그의 활약은 프로야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의 활약은 한국의 프로야구를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주었다. 83년 그가 거둔 시즌 30승은 아직까지 원년 박철순의 22연승, 백인천의 4할타율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불멸의 3대기록으로 남아있다.

2004년 문학구장 홈개막전을 치루는 SK와이번스에서 그를 초대해 올드팬들의 향수를 달래려 그의 근황을 수소만 했지만 연락이 닫질 않았는데, 이미 그는 그저 일본에서 운수업 또는 택시운전을 한다는 소문을 뒤로하고 1년여전 교통사고로 사망해 버린 후였다.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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