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부시’와 ’盧리스도’께

‘안보’란 안전보장의 약자로 알고 있다. 그럼 누구의 안전보장인가? 국가를 이루는 시민들의 안전보장이다. 국가는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납득할 수 없는 어떤 초현실적인 이유에서 자국의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제 나라 시민의 절규를 차갑게 외면해버렸다. 이게 저들이 말하는 ‘안보’다.

저들은 파병의 ‘실리’를 말한다. 야만적 인신공희(人身供羲)까지 하는 것을 보니 파병으로 생기는 엄청난 ‘실리’가 있기는 있나보다. 그 ‘실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궁해도 그렇지 설마 남의 목숨 팔아 이득을 취하겠는가? 모두가 나눌 수 없는 이익이니 공익은 아닌 것 같고, 파병의 ‘실리’란 저들만의 사익임에 틀림없다. 남을 죽여 챙기는 ‘실리’, 대체 뭘까?

저들은 ‘현실’을 말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같이 맹구같은 비현실적 헛소리다. 파병을 거부하면 부시가 토라져 평양을 폭격하고, 김정일이 열받아 서울에 핵폭탄을 떨어뜨린다는 얘기다. 이 유치한 공상과학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외교전략이자 안보전략이다. 김선일씨는 충무로에서도 비현실적이라 웃어넘길 이 3류 시나리오에 따라 목숨을 잃었다.

이게 국민위한 안보인가

과거에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는 균형추였고, 제 나라 백성의 지지를 못받는 정권의 유일한 정치적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이제 남북의 군사적 균형의 추는 남쪽으로 기울었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기댈 필요도 없어졌다. 그런데도 아직 봉건제를 연상시키는 불평등한 한·미관계가 지속되는 이유는 뭘까?

이것은 미국과의 관계 이전에 우리 내부의 관성의 문제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는 수도관에 형성된 기득권층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장기집권을 누리고 있다. ‘실리’는 이들의 ‘실리’이고, ‘안보’는 그 기득권의 안전한 보장이며, ‘현실’은 수십년간 변함없는 이 사태의 견고한 사실성이다.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이 “파병은 콜레라요, 파병 거부는 페스트”라고 했다. 페스트로 죽느니 차라리 콜레라를 “가볍게 앓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에게 김선일씨의 죽음은 가볍게 앓는 콜레라요, 노무현 정권의 안전성이 흔들리는 것은 페스트만큼 끔찍한 사태다. 그래서 그 와중에도 만두를 먹으며 “한사람 잡혀간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있냐”고 되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안보’란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은 분명 아니다. 대한민국에 중요한 것은 부시 정권의 재선이지, 제 나라 시민의 목숨이 아니다. 성(聖) 부시의 십자군이 수행할 거창한 ‘신적 과업’에 비하면, 김선일의 목숨은 얼마나 하찮은가. 우리 주 노(盧)리스도께서 하시는 위대한 “민주개혁”의 사명에 비하면, 김선일의 목숨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4천만 목숨이 다 재고품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가철학이다. 하긴, 인구가 4천만인데 그 중 하나쯤 죽는다고 어디 대한민국이 망하겠는가? ‘대’를 위해 희생시킬 ‘소’는 그러잖아도 차고 넘친다. 대한창고에는 아직도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베라고 내줄 수 있는 3천9백99만9천9백99개의 목이 빼곡이 재고품으로 쌓여 있다. 목 하나 베인다고 파병 철회하는 나라도 있던가?

충격은 ‘참수’의 끔찍함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정작 충격적인 것은 ‘당신이 위험에 처해도 대한민국은 결코 당신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살려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조국은 절대로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지금 파병하자고 외치며 부시의 선거운동이나 하는 저들이라고 이 국방색 운명에서 자유로울까? 김선일의 호소를 외면한 그들이 인질로 잡히는 날, 그때는 나도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파병에 찬성할지 모르겠다. 당신들 없어도 대한창고에 재고는 많다.

〈진중권/문화비평가〉

요즘은 퍼다 나르는게 내 일인듯 싶다. 사실 요즘 일들에 무언가 이야기할 의지가 박약되어 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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