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었던 87년 KAL기 폭파의 진실

91년 군번이었던 나는, 강원도의 화랑사단이란곳에서 군생활을 하게 되었다. 전 300여명의 훈련병들이 가야할 소총소대에서 나혼자만 사단본부로 배속된 사실에, 나는 무척 조교들에게 고초를 당했다.

그리고 퇴소할무렵, 나를 그렇게 괴롭혔던 조교들이 나를 밖으로 데려나가서 술을 사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야 내 아버님과 사단장님이 고등학교 동창임을 알았다. 사단장 백으로 소총소대에서 빠진나를 증오한 조교들은, 사단장 옆에 가게될 계급장도 달지 않은 나에게 짜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죽이고 싶던 조교들은 산골 농부의 아들에서 별 내놓을것 없는 우체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그 술자리에서 알게 되었다. 난 그들을 미워할수 없었다. 사단장 백에 편안하게 부관참모부에서 군생활을 할 빽좋은 놈이었다면,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아직도 그들을 탓하지 않는다.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괴롭혔지만 바로 그것이 한국의 가장 하부구조 까지 뿌리박혀있는 피할수 없는 힘있는 자에 대한 보편적 힘 없는 자의 처신이었겠지. 게다가 군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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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의 부관출신이었던 사단장. 당시 진급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의 부관참모부에서 내가 처음 했던 일은 군우병이었다. 부대내의 모든 우편물을 시외(市外)로 나가서 받아와선 사단내로 보급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보직의 특성상 사단 군사 우체국에는 보안대 사람들이 드나드는 일은 당시로썬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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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사는 홍천에서 태어난 토박이었다. 부대에 들어올때는 사복을 입고 들어오고, 게다가 긴머리는 그의 특권(特權)이었다. 중사였지만 나는 그가 하사란걸 알고 있었다. 아니 부관참모부의 모든 고위급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그는 김중사였다. 보안대의 파워는 그당시 그만큼 대단했다.

그리고 그는, 우편물이 폭주하는 기념일이나 발렌타인데이. 그리고 부재자 선거때에는 나와 밤을 세웠다. 당연히 나랑 친해졌다. 휴가를 가고 싶으면 그에게 부탁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단순한 일병 계급이었지만 , 파워게임의 중심인 군대에서 나를 건드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편지는 군인에게는 생명수였고, 스튜어디스들의 위문편지는 고참에서 그 콧대높은 육사출신 장교들에게까지 마치 프리패스 현금과 같았거든. 그걸 나는 통제했었고, 몇개월 지나지 않아 나는 다치지도 않은 부모님의 사고 전보를 조작해, 고참들을 휴개보낼수도 있는 힘을 가질수 있었다. (물론 사수에게 모두 배운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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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사의 집은 홍천의 평범한 군인 아파트 단지였다. 외박때 시내에서 둘이서 퍼지게 술을 마시고 그의 집에서 잘때였다. 그리고 그때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방에서 입가심 맥주를 할때. 어두컴컴한 방에서.

지금도 기억하는 그의 취한목소리, 난 그때 KAL기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서 떨어졌다는 사실외에 아무것도 아는게 없는 바보였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 그런데 그 안기부 선배도 확실히 이야기 못하는건.. 그 비행기가 그냥 정비불량으로 떨어졌느냐. 아니면 정말 안기부 해외공작부에서 떨어뜨렸느냐는거야. 그건 나한테 이야기해준 안기부 선배도 모르더군. 자기가 소속된 곳 업무가 아니라서 그건 모른대. 안기부 애들 사내 식당에서 식사할때는 절대 대화를 못한대. … 걔들 간첩은 맞긴 맞는데, 이전부터 이미 안기부 애들한테 유럽에서 추적당했던 애들이래. 비행기 떨어지자 마자 유럽에서 잡혀서 한국으로 압송되어서 그동안 행적들 조작해서 비행기 폭파한거로 그대로 뒤집어 쓴거야. 대선때문에…. 얽혀든 애새끼들이 안됐지.뭐. “

김중사는 그말을 하면서 분노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들에서 이미 그것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오래동안 고민했다는 느낌을 받을수 있었다.

난 그이야기가 무슨 이야긴지 그때는 이해를 못했다. 그리고 제대후 2004년 5월.. 얼마전 KBS에서 KAL기 폭파사건의 진상 2개 프로를 보고나서야 그때의 김중사 이야기가 모두 이해가 갔다. (그당시에 들을때는 전후 설명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그의 취한 독백이었다. 나를 배려하지 않은….) 게다가 프로가 진행될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티비에서 말하는 의문들이 김중사의 그때 말과 희안하게 이가 맞아 들어갔다. 92년인가 93년도에 그가 말했던 사실과, 지금 2004년에 티비에서 말하는 의문들과….확실히 KBS프로를 보면서 느낄수 있었다. 아. 이건 그냥 산골짝에서 군생활하는 김중사의 머리에서 나온게 아니였구나. 정말 뭐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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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난 아직도 김중사의 그 말이 실체적 진실인지 명확히 증거할수 없다 . 그러나 내가 확실하게 아는것은, 그당시 91-2년도에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유가족 조차도. 그런데 보안대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 그때로선 정말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랑 친했던 김중사. 내가 아는한 그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 흔한 농담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둘이서 그날 소주 10병을 넘게 마시고 자기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혀가 꼬인채로 말하던 그 이야기를 나는 아직도 잊을수가 없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110여명의 의문스런 죽음들을..

.. 형이라고 부르라던 김중사는 지금 뭐하고 계실까. 보고싶다.

<피아노맨 / 내가 겪었던 KAL기 폭파의 진실..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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