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었던책. 조갑제의 <사형수 오휘웅의 이야기>

어느 사회의 양식을 가늠해보는 한 기준은 “그 사회의 소수파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가”이라고 한다. 장애자를 위한 정부 예산은 그 국가의 국민총생산(GNP)에 비례하지 않고, 그 국가의 민주화 정도에 비례한다는 조사보고도 있다. 민주화란 결국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이고, 그런 사회에서 고통받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다수의 사람들이 애정 어린 관심을 갖게된다는 뜻이겠다.

비슷한 논리로서 어떤 사회가 가진 법의 양식이나 민주화 정도는 사형 및 사형수에 대해 구성원들이 얼마나 많은 관심을 보이느냐가 하나의 잣대가 될 것이다. 외국에서는 사형 폐지가 대세로 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2년 전에 강도강간범에 대한 공개처형이 거론되었으니 이 나라의 관심은 대세를 역류하는 방향이었다.

한국에서 사형 집행되는 사람은 한 해 평균 스무 명쯤이다. 이 극소수의 인간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들의 머리수에 있지 않다. 지구보다도 무겁다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 능력의 한계 문제가 걸린 대목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다음 나는 형사정책학회 세미나에서 ‘사형 집행의 실제와 억울하다는 유언’이란 제목의 발표를 했다.

발표가 끝난 뒤 오판에 의한 사법살인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어느 변호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사형집행을 할 때는 그 사형수를 수사한 경찰관, 기소한 검사, 사형을 선고한 판사들이 반드시 형장에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도록 법제화하자는 제안이었다.

자신이 수사하거나 선고한 그 사형수가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보아야 한다면 수사관들과 판사들은 좀 더 성실하게 조사하고, 진지하게 판단하여 오판이나 무리한 사형 선고는 줄어들 것이라고 그 변호사는 말했다. 이 책의 주인공 오휘웅씨는 형장에서 수사관들과 판사들을 저주하면서 “엉터리 재판 집어치라 !”고 소리쳤다.이런 장면을 담당 판사나 수사관들이 본다면 악몽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낼 것이다.

사형은 평화시에는 유일한 ‘합법적 살인’이다. 결과만으로 말한다면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는 스스로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살인범은 수많은 번민과 갈등을 거듭한 끝에, 천인단애에서 뛰어내리듯 하는 결단으로써 살인을 감행한다. 우리나라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판사들이 살인범만큼의 번민과 결단으로써 임한다 해도 ‘억울한 사형 집행’은 인간능력의 한계로 해서 완전히 피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보다는 크게 줄어들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형선고에 의한 결과는 살인이지만 그것은 수사관이나 판사의 입장에서 볼 때 복잡한 문서나 법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제도적인 간접살인이다. 간접경험은 아무래도 충격이 덜한 편이다. 사형선고란 행위와 사형 집행 사이엔 제도라는 완충제가 있기 때문이다. 오판에 의한 사형 집행이 있었다 해도 판사는 이렇게 생각할 지 모른다.

“나만의 잘못이 아니지 않는가. 경찰도 검찰도 잘못했고, 1심과 2심의 재판부도 잘못하지 않았는가. 서류나 증거로는 그럼 판단을 안할 수 없었지 않았나. 아니 그 녀석도 잘못했지. 왜 자신의 무고함을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했단 말인가” 이렇게 되면 오판은 제도의 책임으로 돌아가 버린다.

대한항공 007편 점보기에 미사일을 쏜 소련 전투기 조종사는 칼로써 2백69명을 차례로 찔러 죽인 것과 똑같은 결과를 불렀다. 그러나 그 조종사는 2백69명을 제 손으로 학살한 만큼의 양심상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내가 한 일이란 발사단추를 누르는 것뿐이었지 않은가” 기계화된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소외되듯 굳어진 법제도 안에서도 인간과 인간애는 따돌림을 받게 된다. 관심과 지식이 비례하듯, 인간에 대한 애정 속에서만 현명한 재판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외람된 희망이지만, 이 책이 사형과 오판에 대한 토론의 한 자료가 되고, 그리하여 사형을 선고할 분들이 판결문을 쓰기 전에 한 번쯤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억울한 죄와 벌의 희생자들, 그런 불의에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형수를 위해 일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런 글의 값어치를 인정해 주고 작업을 독려해준 한길사 김언호사장에게 감사한다.

1986년 7월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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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행계획

1) 억울한 목에 밧줄이 안 걸리도록

끔찍한 살인의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폐지론자가 된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사형존치론자가 될 가능성이 많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주로 대중매체를 통해 범행의 현장이난 범인의 악독성을 생생하게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에서 증오심이 우러나온다. 오죽했으면 강도 강간범에 대한 ‘공개처형’까지 거론됐을까. 한편 사형집행에 대한 정보는 극해 제한돼 있다. 교도소 담 안의 어느 밀실에서 이뤄지는 이 ‘합법적 살인’은 국가 기밀도 아니고, 그 상황의 공개를 어느 누가 법으로 금한 적도 없지만 좀처럼 사실대로 알려지지 않는다. 집행에 참여한 사람은 꺼림칙해서 입을 다물고, 언론도 사형집행을 현대의 신화로 남겨놓고 싶어한다.

가끔 사형집행된 흉악범의 수기나 편지가 참회록이란 제목으로 잡지에 실리기는 한다. 거개가 기독교에 홀딱 빠져 기쁨에 충만한 속죄의 삶을 살다가 천당가는 기분으로 교수형을 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흉악범들이 예수를 믿게 됐다는 배경 하나로 ‘하느님을 모르는 죄인들’을 오히려 동정하는 듯한 언사를 하고, 세상 사람들을 척 내려다보는 듯한 투로 쓴 글이 보통 사람들에겐 도대체 기분이 나쁜 것이다. 이런 반발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래, 박철웅, 그 놈은 감방에서 다른 할 일이 없으니 예수를 믿은 모양인데, 그래서 천당에 갔고, 그 놈한테 목숨을 빼앗긴 세 사람은 예수를 안 믿어서 지옥에 갔단 말인가.”

이런 수기나 참회록은 사형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방해한다. 비신자에게는 광기로 비치기도 하는, 집착과 신앙으로 채색된 그들의 참회는 사형 비밀주의와 함께 한국의 사형제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오히려 그르칠 수도 있다. 사형 비밀주의는 결국 사형제도의 존속을 위해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 세계 형사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모른다’는 것은 가끔 무관심이나 증오심으로 이어진다. ‘안다’는 것은 으레 합리나 신중으로 연장된다. 사형집행을 목격한 판사는 그 뒤로는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한번쯤은 다시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2) 2년간 집행 명령서의 결재 보류

사형집행은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 이뤄진다. 장관의 취향에 따라 사형집행의 횟수가 크게 다르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법무부장관으로 있었던 황산덕 씨는 고 육영수 여사 살해범인 문세광에게만 집행 명령을 내렸고 일반 사형수에게 한번도 집행명령서에 결재를 하지 않았다. 유명한 형법학자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황산덕 씨는 “아무래도 내 손으로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 꺼림칙하여 연말에 검찰국에서 사형집행 기안을 올릴 때마다, 조금 기다리라면서 서류를 돌려보내 버렸다”고 했다. 문세광에 대한 집행명령서도 자신이 제주도로 출장 가 있는 사이 차관이 대신했다는 것이다. 황산덕 씨의 기억에 따르면 집행보류로 전국 교도소에는 약 1백명의 사형 확정수가 적체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후임 법무부장관은 1976년 12월 27일, 28일, 1977년 3월 26일 세 차례 수십 명의 사형집행을 명령했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1976년 12월 27일, 28일 양일간 11명이 처형됐다. 이틀 연이어 집행이 진행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후임 법무부장관의 사형집행 보고를 받고 뒤늦게 황 장관의 2년간 보류조치를 알았는데, 어느날 “왜 그랬느냐”고 물었다. 황 장관(당시는 문교부장관)은 “그래도 문세광이는 처형했잖습니까”라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사형집행장이 잇는 곳은 전국에서 세 군데이다(군 형장은 제외). 서울구치소, 대구교도소, 광주교도소. 사형집행은 이 세 곳에서 같은 날짜에 이뤄지는 것이 원칙이다. 사형집행은 법률(행형법 57조)에 따라 국경일이나 일요일, 공휴일에는 못하게 돼 있다. 사형을 대기하는 확정수가 많았던 1950년대에는 집행일이 특정되지 않고, 거의 한달에 한 번꼴로, 또는 더 자주 사형이 집행됐다고 한다. 참고러 1960년대의 사형집행자 수를 보면 1963년에 20명, 1964년 14명, 1965년 21명, 1966년 13명, 1967년 17명, 1968년 26명으로 나타나 있다(신진규,「형사정책」Ⅱ).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주로 봄(3,4월)이나 12월 하순 두 차례 집행이 치루어졌다. 1980년대에는 9월이나 10월말에 집행이 되기도 했다. 1982, 1983년에는 한여름 복중에 집행이 있었다. 형장에 24시간 보존키로 돼 있는 시체가 썩어 그 냄새가 진동했다.

전국에서 가장 사형집행 건수가 많은 서울구치소의 경우엔 한번에 5〜6명씩 교수(絞首)하는 게 보통이다. 최근엔 정부통계에서 사형집행자 수가 나타나지 않는데 매년 20명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피고인 수는 1980년에 32명, 1981년 33명, 1982년 35명, 1983년 19명, 1984년 18명이었다. 1970년대 이후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는 달은 1, 2월이다. 이때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사는 사형수들도 약간 안도할 수가 있다. 사형집행이 있음직한 4월이나 12월 하순에는 사형수들이 바싹 말라간다. 서울구치소에서 오래 근무했던 어느 교정공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가 오면 그들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가족에게 연락을 해달라는 부탁이 잦아지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고, 재소자와 자주 다투는가 하면, 교화업무에 협조를 하지 않고, 투정을 부리기 일쑤지요. 그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조용해집니다. 반대로 경축일이 가까이 오면 혹시 감형이나 되지 않을까 숨을 죽여 기다리지요.” 법무부장관의 사인이 없으면 사형수는 기한 없이 연명을 할 수가 있다.

1960년대엔 10년 이상 그렇게 살고 있는 사형수도 있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확정 뒤 7년 정도 연명한 것이 최장 기록이었다고 한다(서울구치소의 경우). 박철웅, 김대두 씨 등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형수일 경우엔 확정된지 1-2년 안에 집행해버리기도 한다. 억울하다고 재심을 신청하는 사형수에겐 그것이 최종적으로 기각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심 개시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즉 재심신청 사실만으로는 사형이 연기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재심을 신청하는 사람들 중에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는 사형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확정된 이후에도 3-5년즘 더 살다가 가기도 한다. 1984년말 현재 서울 구치소에는 24명의 사형 확정수와 14명의 미확정 사형수가 있었다. 전국 숫자는 1백명을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1983년 7월 윤상 군 유괴범 주영형 씨 등이 처형된 이후엔 줄곧 집행이 없었다. 법무부장관이 바뀐 지 석 달이 지난 지난해 10월 31일에 전국적으로 집행이 있었다.

3) ‘집행 차출’ 면하려고 발버둥

사형집행의 결정은 교도소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므로 교도소에선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짐작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날 갑자기 대검찰청에서 사형수 대여섯 명을 지정, 사진촬영과 건강진단을 해올리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다. 교도소나 구치소에선 여러 사형확정수 가운데 그 몇 사람만 불러내면 그들이 눈치를 채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여 모든 사형수에 대해 촬영과 건강진단을 해버린다. 그때부터 사형수들은 전전긍긍해 한다. 사형집행 명령서가 구치소장 앞으로 전달(인편)되는 것은 보통 그 건강진단이 있고 나서 석 달쯤 지난 때다. 건강진단의 대상이 된 사형수가 거의 그대로 사형집행자 명단에 올려진다.

집행명령서는 하루 전에 전달된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집행의 준비는 대충 이렇게 한다. 먼저 소장이 보안간부와 교무간부를 불러 집행계획을 의논한다. 집행을 주관하는 쪽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조용한 집행’이다. 집행장에서난 감방에서 끌려나올 때 소동이 벌어지지 않도록 계획을 짠다. ‘참회 속에서 양순하게 가주는’것이 교도소측이 바라는 바다. 집행순서가 문제다. 특히 첫 사형수가 어떤 태돌고 죽느냐 하는 것이 그날의 형장 분위기를 좌우한다. 소장은 으레 구치감의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사방에 있는 사형수부터 차례로 집행하자고 한다. 그래야 먼 감방에는 사형집행 소식이 늦게 알려져 뒤에 집행받는 사형수의 동요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사형수 교화를 맡고 있는 교무간부는 “신앙심이 깊고 얌전한 사형수를 가장 먼저, 그리고 눈, 콩팥 등 신체 기증자를 맨 끝으로 돌려야 분위기도 잡을 수 있고, 이식수술의 절차도 순조롭게 진행된다”면서, 다른 집행수서를 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출입구에서 가까운 사형수부터’란 관례가 채택된다.

이어서 사형집행에 종사할 인원을 뽑아낸다. 스무 명쯤이 필요한 ‘사형집행인’으로 자원하는 이는 있을 턱이 없고 거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고 한다. 신경쇠약 증세가 있다, 곧 결혼할 때인데…, 아내가 임신중이다 등등의 사유가 등장한다. 딱 부러지게 “차라리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해버리는 이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순번을 정해놓고 공평하게 사형집행의 기회를 배당하곤 한다. 인원편성이 끝나면 교무계에서는 집례를 맡을 신부, 목사, 스님에게 “내일 급한 일이 있으니 아침 일찍 나와달라”고 연락을 취한다. 평소에도 교도소에 파견돼 있다시피 하는 이들 성직자들은 단번에 그 말의 뜻을 헤아린다. 교무계에선 집행될 에정인 사형수들을 맡아 1주일에 한번씩 ‘사형수교회’까지 와서 예매를 올려주는 여신도들에게도 “내일 교무계로 나와 달라”고 연락을 한다. 사형수 유족에겐 집행 뒤에 알린다. 집행 당일 새벽에 사형장 청소가 있다. 재소자들이 하는데 이 소문이 퍼지면 감방은 술렁인다. 구내 공장에서 전날 저녁에 돗자리, 그리고 용수를 만들었다는 소문도 금새 퍼진다.

4) ‘넥타이 공장’의 모습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 개시 시간은 오전 10시이다. 1970년대 이래의 관습이다. 이 관습이 두 번 깨졌다. 문세광과 김재규는 이른 아침에 처형됐다. 김재규의 하수인인 박선호 등 네 명은 오전 10부터 처형됐고. 사형집행날, 아무리 보안을 해도 이날 아침에는 재소자들이 낌새를 채게 된다. 기상 나팔 직후에 나오던 방송이 안 나오고, 야외 사역이나 아침 운동이 없고, 통로의 출입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삼엄한 분위기에 짓눌려 구치소는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형법 66조는 사형은 교도소 안에서 교수형으로 하고, 군형법은 지정된 장소에서 총살로 집행하도록 정해놓았다. 사형이 교수형과 총살형으로 정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다. 법에 명시된 것은 1905년 형법대전 제 94조가 ‘사형은 교(絞)로 한다’고 못박은 것이 처음이다. 세계적으로 교수형이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사형 방법이다. 미국에서 주로 쓰는 ‘가스 중독살’과 함께 고통이 덜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대가 있는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사형수는 행형법 제 13조에 따라 구치소나 미결수용실에 수감된다. 그들이 미결방에 들어 있는 것은 사형수는 집행과 동시에만 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미결수다. 서울구치소의 미결 구치감은 4천 평 가량 되는 대지 위에 서 있는 흰 벽돌 2층집이다. 여기에 6개의 방이 있고 각 방은 상하층으로 돼 있다. 이 구치감의 벽은 높다. 그 북쪽 벽에 철문이 하나 있다. 이 철문을 나서면 무학재 너머 금계산이 보인다. 철문에서 북쪽, 즉 금계산 쪽으로 맨 땅에 길이 나 있다. 재소자들이 자주 불려가는 운동장이나 의무실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런데 한 30걸음 걷다가 보면 왼쪽으로 꺾어지는 샛길이 나온다. 이 샛길을 옛날 재소자들은 ‘지옥 3정목’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일제시대부터의 별명인 듯하다.

사형수들이 지옥으로 가는 번잡한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곳이란 뜻이라 한다. 이 색실을 따라 열 걸음쯤 더 걸으면 왼편에 높이 3.5m쯤 되는 흰 담벽이 나온다. 담벽에 붙은 철문을 들어서면 잡초 투성이의 모래 땅바닥에 서 있는 15평 가량의 직사각형 목제 기와 건물과 만나게 된다. 높은 흰 담벽이 직사각형(15×10m)으로 이 하얀 건물을 에워싸고 있어서 바깥에선 건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이 처형장이다. 이 담벽은 그러니까 구치감에서 의무실쪽으로 가는 길의 왼편, 즉 서쪽에 있는데 남쪽 담은 구치감 북쪽 벽에서 약 15m쯤 떨어져 있다.

2. 연출과 인정신제

1) “집행 날짜를 알려주었으면… ”

사형수를 형장까지 데리고 오는 것을 연출(演出)이라고 한다. 연출조는 무술에 능한 건장한 보안과 직원 3명으로 구성된다. ‘지옥의 사자’격인 이들이 어느날 오전 갑자기 감방정문 앞에 나타난다. 덜컹, 문을 열고는 “19××번 의무과로 체중검사! 빨리나와!”라고 소리치거나 “전방(轉房)!”이라고 외친다. “형장으로 갑시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사형날짜를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옛날엔 사형집행장으로 들어가는 ‘지옥 3정목’의 샛길에 이를 때까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다. 지난 1982년 여름에 처형된 금당사건 주범 박철웅 씨는 교도소 직원들에게 그 전부터 집행장의 구조나 분위기를 캐묻곤 했다. “한번도 못 본 곳이라서 그럽니다. 미리 생각해두면 그날에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씨는 “집행예정일도 귀뜸해달라”고 했다. “몸도 깨끗이 하고, 책도 정리하고, 같은 방 형제들과 작별 예배라도 보고 가야지요.”

예정일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집행일 오전 그를 데리러 간 연출조는 “오늘은 하나님 앞으로 가는 날이다”라고 참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박씨의 수갑도 풀어주었다(사형수는 1심에서 사형구형이 떨어지면 집행 때까지 수갑을 차야한다). 이것도 ‘특례’였다. 박씨는 태연하게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성경, 찬송가 등 자기 물건을 정리한 뒤 감방 동료들과 작별 예배를 보고 형장으로 향했었다. 일본 오오사까 구치소에선 집행 이틀 전에 이 사실을 사형수에게 알려주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 기간에 사형수는 가족과 마지막으로 만나 구치소 안에서 식사를 함께 할 수도 있다. 사형수들은 신변을 정리한 뒤 집행 직전에 설사촉진제를 복용, 배 속까지 비우고, 가뿐한 기분으로 형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고중열 씨(64세 화양천주교회 근무)는 서울구치소에서 지난 1954에서 72년까지 18년간 근무하면서 사형수 교화에 종사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사형수를 가장 많이 상대했고 사형집행 현장에도 가장 많이 참여했으며 약 4백 명의 사형수를 대자(代子)로 만든 사람이다.

그는 심지가 굳은 사형수에겐 집행당일 아침 일찍 감방으로 찾아가 “오늘 천국으로 갈 것 같으니 끝까자 자세를 흐트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거개가 담담하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고 형자에서도 그랬다는 것이다. 고씨는 이런 소감을 책에 쓴 적이 있다. “최소한 형집행 1, 2개월 전에 성직자(교도소 담장)에게 집행일자를 알려 떠날 준비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비록 죽어야 할 인생이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얼굴 붉힘도 없이 완전한 죽음으로써 평안히 떠날 수 있도록 조그만 시간을 주고 후회없이 (형장의) 쪽대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갈 수 있게끔 준비시켜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닐까”(고중열,「서울구치소」).

2) 여섯 번 죽은 사형수

사형수는 연출조가 데리러 왔을 때 대충 눈치를 채고 늦어도 구치감 철문을 나서는 순가, 삼엄한 분위기로 해서 그는 ‘오늘의 운명’을 알게 돼 있다. ‘지옥 3정목’샛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무계장과 ‘담당’(그 사형수의 종교에 따라 담당직원이 정해져 있다)이 뛰어오듯이 다가와 사형수 양쪽에서 바짝 붙어 손을 잡으면서 간곡하게 말한다. 그 당부는 대체로 일정하다. 기독료 신자에겐 “하느님께 영광 돌리자,” 불교신자에겐 “극락에 가도록 하자,” 신체기증을 약속한 사형수에겐 “유언 때 그 이야기를 꼭 해달라.” 사형수의 손은 예외 없이 땀에 젖어 축축하다고 한다. 이때 사형수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지만 아무리 신앙이 깊고 담이 큰 사람이라도 약간의 동요는 있기 마련이다. 심한 경우엔 하체에서 힘이 빠져 달아난듯이 주저 앉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들어갈 때 그렇게 하듯이 뒤로 뻗대기도 한다. 그러면 연출조가 양쪽에끼고, 들듯 하여 끌고 간다. “먼저 갑니다,” “그동안 신세졌습니다”라고 인사하는 사형수도 있다. 박철웅 씨가 그랬고 1979년 9월에 처형된 오휘웅 씨가 그랬다. 어느 사형수는 몇 년 전 백지장 같이 하애진 얼굴에 흰자위만 남은 눈을 번득이며 “개새끼들, 날 왜 죽여!”라고 절규했다. 교무계장과 담당이 사형수의 양쪽에 서고, 바로 뒤에 세 연출조 직원이 부축하듯이 뒤따르면서 일행은 샛길로 꺾어들어 왼편 담벽의 철제쪽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재소자들이 ‘넥타이 공장’ 또는 ‘고만통’이라고 부르는 집행장 건물이 스산하게 거기 서 있다. 이 건물이 시야를 확 메울 때 사형수는 다섯번째로 죽는다고 한다. 1심 선고 때, 2심 선고 때, 3심 확정 판결 때 죽고,‘지옥 3정목’에서 꼬부라질 때 네번째 죽고, 이 건물을 봤을 때 다섯번째 죽고, 교수대네서 여섯번째로 마지막 죽음을 맞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어디 여섯 번뿐이겠는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감방 문이 열릴 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방송이 갑자기 안 나올 때마다, 비상이 걸릴 때마다, 아침 운동이 중단될 때마다, 옆방의 사형수가 사라질 때마다, 시간마다, 분마다 죽어가는 것이 사형수의 삶이다.

3) 집행장 돗자리 위에 앉다

높은 흰 담벽에 둘러싸인 집행장 건물에는 양쪽 측면에 둘, 북쪽에 하나, 모두 세 개의 쪽문이 나 있다. 북쪽 담벽문과 가장 가까운 북쪽문은 사형집행을 주관하는 검사, 구초소장 등이 드나든다. 사형수는 북쪽 담벽문을 지나 이 건물을 왼쪽으로 돌아서 동쪽 측면에 난 쪽문을 통해 형장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형수는 우선 교오함에 압도된다. 벽면을 따라 스무 명쯤 되는 사람이 꽉 서 있는데도 형장 안은 침묵, 바로 그것이다. 남쪽 구석의 별실에 칸막이처럼 늘어뜨려져 있는 하얀 커튼이 그의 시야를 메우게 된다. 내벽은 흰색계통이고, 천정에선 백열등이 빛나지만 형장 안의 분위기는 음울하다. 집행장의 마루바닥은 시커멓게 변색된 그대로다. 새벽에 청소는 했지만 군데군데 뽀오얀 먼지가 얹아 있다.

사형집행 당일에만 청소를 하니 흉가 같은 집행장은 누추할 수밖에 없다. 마루바닥의 앞쪽, 그러니 북쪽에는 높이 60cm쯤의 강단이 있다. 강단과 마루 사이엔 목책을 닮은 경계목이 박혀 있다. 강단의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고, 그 뒤에 세 사람이 앉는다. 가운데가 구치소장, 그 오른쪽이 검사, 검사의 오른쪽이 입회서기 자리다. 탁자 위에는 검은 보자기가 덮여 있고, 그 위에는 서류뭉치가 놓인다. 그 사형수의 신원기록과 판결문, 재심신청서 등이 묶여 있는 신분장이다. 강단의 뒤쪽 벽면을 따라선 벤치가 두 개 놓여 있다. 여기엔 사법연수생들이 견학차 와서 앉기도 한다. 구치소장이 앉은 자리 왼편에선 작은 탁자를 앞에 두고 명적과 직원이 앉는다. 유언을 적기 위해서다. 그 뒤 의자엔 목사, 신부, 스님 등이 앉는다. 강단 바로 밑 구치소장 바로 눈 아래 마루바닥에 돗자리가 깔려 있다. 전날 짠 것이든지 깨끗한 가마니를 뜯어낸 것이다. 사형수는 이 돗자리 위에 편하게 앉혀진다. 연출 때 그대로 그의 양쪽엔 교무계장(오른쪽)과 담당이 서고 등 뒤편엔 3명의 연출조 직원이 선다. 양쪽 측문에 3명씩 모두 6명의 보안과 직원이 서서 계호한다.

4) “그만 읽어요”—사형수의 항변

사형수가 앉자마자 집행관인 구치소장은 인정신문(人定訊問)을 시작한다. 집행인들은 이 고역을 빨리 끝애야겠다는 강박심리에 쫓겨 서둘러 이 의식을 치러버리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인정신문은 법정의 그것과 거의 같은데, 신분장과 대조하면서 묻는다.
“몇 번이죠?”
“성명은?”
“본적은?”
“주소가 어떻게 되죠?”
“생년월일을 말씀해보세요?” 이때 사형수가 대답을 잘못하면 주소나 생년월일 등을 읽어주고 “예”라는 간단한 대답을 구해낸다. 드물게 흉터, 반점 등 신분장에 나타난 신체상 특징을 확인하여 엉뚱한 사람이 처형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기도 한다. 이어서 소송과정에 대한 확인이 계속된다.

“19××번 ×××는 197×년 ×월 ×일 ○○○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맞죠?”
“예”
1976년 12월말에 있었던 강도살인범 엄기덕 씨에 대한 인정신문 때 구치소장은
“엄기덕은 강원도 춘성군에서 달구지를 끌고 가던…”이라고 공소사실의 요지를 낭독해갔다. 이를 듣고 있던 엄씨는 갑자기
“소장님, 제가 한 일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낭독을 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당당하게 항변했다. 소장도 이 말을 받아들여 그 부분을 생략해버렸다. 사형수들에겐 마지막 가는 자리에서 새삼 자신의 범죄사실을 소상히 들어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노릇일 것이다. 고지식한 구치소장들은 공소사실 낭독을 성실히(?)하곤 했는데, 사형수들의 항변이 잦아 요즈음엔 그냥 ‘××사건’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197×년 ×월 ×일 항소를 제기했죠?”
“예.”
“197×년 ×월 ×일 그 항소가 기각됐죠?”
“예”
“…상고를 제기하여 기각됐죠?”
“예” “그래서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오늘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서 사형을 집행하겠습니다. 유언이 있으면 하시죠.”

3. 유언

1) 조봉암과 박철웅, 주영형의 유언

사형집행의 의식에서 유언은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인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말이기 때문이다. 그 무게는 법정에서 하는 최후진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희미해져가는, 때로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어지러운 의식속에서, 혹은 원한이나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그래도 최후의 안간힘을 다 써서 정신을 가다듬고 뱉아내는 마지막 말에는 그 사형수가 살아온 인생의 총체적 무게가 걸려 있다고 봐야 한다. 조봉암 씨의 사형집행 때 바로 그의 등 뒤에 서 있다가 용수를 뒤집어 씌운 역할을 했던 당시 서울구치소의 모 직원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정신문을 받기 전에 그는 더부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사형을 집행하려면 수염이나 깨끗이 깎아주고 몸 단장도 좀 시켜줄 일이지…몹쓸 사람들…”이라고 중얼거렸다. 조씨는 유언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가족이 다 잘 알아서 하겠으니 별 말이야 있겠소. 결국 이승만에게 wu서 이렇게 된 것인데…다만 한마디 남겨놓고 싶은 게 있소. 이 나라에서 정치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줄 짐작 못한 바 아니나…그 희생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오.” 태연했던 그도 내가 뒤에서 용수를 씌우자 바르르 경련했다. 그 이틀 전에 조씨와 공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양명산이 처형됐는데, 나는 그깨 포인트(교수대의 마루 바닥을 꺼지게 하여 사형수가 밧줄에 달린 채 지하로 떨어지게 하는 핸들)를 제끼는 일을 했으니 인연이 묘했다.
금당사건 주범 박철웅 씨는 가장 긴 유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기도식으로 유언을 했는데 10분 이상 걸렸다는 것이다. 그의 유언이 너무 길어지자 교무계 직원들은 조마조마해졌다고 한다. 저러다가 자제심을 잃고 횡설수설로 변해 발악을 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그 긴 유언이, 박철웅 씨는 비록 이승의 삶을 초월했다고 장담했으나, 생에 대한 미련의 표현인 것 같았다고 풀이하는 이도 있다. 윤상 군 유괴살해범 주영형 씨는 “나로 인해서 교직자의 이미지가 먹칠을 당한 것에 대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속죄하는 뜻에서 저의 신체를 기증하기로 했습니다”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화투에 손을 댔습니다. 돈을 잃었습니다. 본전을 찾으려 하다가 또 돈을 잃었습니다. 화가 나서 술과 여자를 가까이했습니다. 월급으로는 이자도 못 갚을 정도였습니다. 이럴 때 윤상 군 유괴계획을 세우게 됐습니다. 만사가 잘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사위갈 잘 굴러간다는 생각에서 깨어났을때 저는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사위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지 않도록 하세요.”

2) 사회에 대한 비판 충고의 유언

희대의 살인범 김대두 씨는 사형선고를 받고 화끈하게 변신하여 기독교신도가 됐었다. 1976년 12월 사형집행장에서 그는 뼈아픈 유언을 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사회가 전과자들을 좀더 따뜻히 대해주셔서 갱생의 길을 넓게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두운 그늘에 있었던 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은 더욱 간절하고 누구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전과자들은 출소하기 전에 여러 가지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이루어 보려고 마음이 부풉니다만 모든 사람의 차가운 눈초리만을 대할 때 다시 범죄를 하게 됩니다. 교도소에서 초범자와 전과자는 분리 수용하여, 죄를 배워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뜯어본 뒤 자신을 농락하는 두 고참사병을 쏴 죽이고 지난 1963년에 총살형을 받은 최영오 일병(당시 서울대학교 천문기상학과 4학년 재적)은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한다.

“제가 죽음으로써 우리나라 군대가 관료주의적인 것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적인 군대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무리 비천한 사형수라도 형장에서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려고 애를 쓴다, 천당이나 극락에 간다는 확신을 그런 태도를 취하게 하는 의지력을 주기도 한다. 의연하게 죽어간 사람을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사형집행을 많이 하면서 여러 가지의 인간형을 두루 살핀 서울구치소 출신의 어느 퇴직공무원은 “의젓하게 죽든 발악하면서 죽든 똑 같아 보입니다”고 했다. 의젓하게 죽었다고 위대해 보이지도 않고, 발악하면서 죽었다고 경멸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항변하고 발버둥치면서 죽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인간다와 보이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3) “저는 돈 없어서 죽습니다”

몇 년 전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20대 청년 조경행 씨가 그런 경우였다. 도둑질을 해서 달아나다가 뒤쫓아온 방범대원을 찔러 죽이고 붙들렸던 그는 형자의 돗자리 위에 앉혀지자 그만 울음보를 떠뜨렸다. “저는 돈이 없어서 죽습니다. 변소사 샀으면 이렇게 죽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그는 엉엉 통곡을 했다. 당황한 것은 곁에 있는 교화담당 직원들이었다. “경행이 왜 이러냐”고 달래면서 단상의 신부를 불러내어 예배를 보게 했다. 신부와 함께 성가를 부르면서 이 청년은 침착을 되찾았다. 이때 직원이 소장에게 손짓 신호를 보내자 소장은 집행명의 손짓을 했다. 뒤에서 용수를 씌우려 하자 청년은 다금하게 “유언을 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 호소를 묵살 서둘러 그를 처형해버렸다. 이 집행에 참여했던 직원은 지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했다. 순조로운 집행을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니 마지막 유언까지도 묵살해버린 데 대한 후회인 것이다. 교화담당 직원들은 사형수들이 항변하거나 발버둥을 치면, 그것이 그동안의 교화활동에 대한 먹칠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당황, 수치심을 느끼고, 그해서 서둘러 집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4) “절대자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형수가 종교에 귀의하며 깨긋이 죽어가는 것은 아니다. 사상범일 경우엔 교화가 쉽지 않다. 고중열 씨는 이런 경험담을 썼다(「서울구치소」, p.90)
“보안서원, 공비의 경력을 가진 김모란 40대 사형수가 있었다. 나는 윤경중 신부와 함께 그를 수십 번 면담하여 가톨릭에 귀의시키려 했으나 그는 목석이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김은 그렇게 묻곤 했다.
“그야 간단하지요.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지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요.”
“믿을 수가 없는데요.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아메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끝없이 계속됐다. 나는 “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믿으려고 하라”고 조르기도 했으나 그는 벽이었다.

1966년 4월 12일 그는 사형집행장에 섰다. 김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족에게 남길 유언이 있는가.” 집행관이 물었다.
“유언을 하면 틀림없이 전달이 됩니까.”
“있으면 말하라.” 그는 한숨을 몰아쉬더니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다만, 내 가족에게 죄를 많이 짓고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그의 옆에 서 있던 나는 이때 ‘마지막 기회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윤 신부님이나 나를 통해서 많이 들어왔으니 잘 알겠지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천주교에서 베푸는 대세(代洗)를 받으시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대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현장 앞에 있는 십자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만 믿으면 대세를 받을 수 있고, 대세를 받으면 완전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고 대세를 받으시겠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몸서리쳐지는 침묵이었다. 그렇게 한 10분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집행!”이란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종교에 귀의할 뜻은 없는가?” 집행관도 권유했다. 김은 그대로 목석이었다. 입은 꼭 다문 채,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채, 마치 화석이 된 양 반응이 없었다. “집행!”드디어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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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나에게 큰 영향을 준책이 몇권 있는데, 소위 <넘어넘어>라고 불리우던, 황석영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당시에는 금서였던 광주항쟁에 대한 책이었고, 그중 또 한권은 조갑제씨가 쓴 <사형수 오휘웅의 이야기> 였다.

사형수 오휘웅의 이야기란 책을 접한것은 고등학교때였는데, 하루 밤새에 이 책을 다 읽고 나선 밤잠을 못이루었던 기억이..

“내가 살고 숨쉬고 있는 지금(당시 두환이 시절)시대가 무척 암울한 시대구나. 그리고 진실이란게 이렇게 철저하게 숨겨지고 유린될수도 있구나”

그때부터 내가 받아들이던 당연한것들이, 어쩌면 외곡되었을수 있다는 생각에 아마도 그때부터, 직관적인 눈을 가지기 위해서 무척 노력하기 시작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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